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론 - 생애 및 활동 & 시적 변모과정과 작품 경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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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론
Ⅰ. 생애 및 활동
박목월(朴木月)은 1916년 1월 6일 경상북도 월성군 서면 건천리의 모량이란 마을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영종(泳鍾)이며, 소국(素國)이란 아호로 불리기도 하였다. 조부 박훈식은 일찍이 눈을 뜬 개화의식 소유자였고, 모친은 열렬한 기독교 신앙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보살폈다. 목월은 7세 되던 해인 1929년 3월 건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4월에 어머니의 신앙과 그에 영향을 받은 목월 자신의 희망에 의해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에 입학한다.
목월은 계성학교 재학 시절인 1932년 16세 때 아동잡지 『아이생활』에 동요를 투고하였고, 1933년 『어린이』에 「통딱딱 통딱딱」이라는 동시를 처음 발표하였으며, 그 해 6월 『신가정』에 「제비맞이」가 당선되면서 정식 동요 시인으로 등단을 하였다.
목월은 1935년 3월에 계성학교를 졸업한 후, 경주금융조합에 서기로 취직해 있다가 1938년 공주 제일 예배당에서 유익순(劉益順)과 운명적인 결혼을 하였다. 결혼 후 안정된 생활 속에서 더욱 더 열심히 글을 썼는데, 이 무렵 목월은 동시뿐만 아니라 성인시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39년 경주금융조합에 재직 중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지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9월호), 「산그늘」(12월호)이 추천된다. 그 후, 1939년에 「가을 어스름」, 1940년 「연륜」으로 마지막 추천을 받아 성인 시인으로 등단된다. 목월(木月)이란 아호 겸 필명은 이때 자신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월이 좋아했던 두 시인 중, 수주(樹州) 번영로에게서는 나무 수(樹)자를 나무 목(木)자로 바꾸고 소월(素月) 김정식에게서는 달 월(月)자를 그대로 따서 붙인 이름이다.
1941년에는 동경 유학을 떠나는데, 문학은 홀로 공부하여 터득하는 것이라고 깨닫고 경주로 돌아오게 된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1940년 조선, 동아일보의 폐간, 1941년에 『문장』, 『인문평론』이 폐간되고,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의 발발 등 암흑기가 도래하면서 시 발표는 중단되고 이때 목월은 자신이 쓴 작품을 땅에 묻어둔다.
1945년 해방 후, 목월은 김동리의 권유로 청년문학가협의회에 가입하면서 조지훈, 박두진 등과 교류를 나누게 되고, 1946년 6월에 ‘자연 지향’이라는 공통적인 시 세계를 추구하는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세 사람의 합동시집 『청록집』을 낸다. 목월은 1949년 서울로 집을 옮겨 이화여고 교사와 한국문학가협회의 사무국장으로 바쁘게 활동한다. 이 기간에 박두진, 조지훈과 1950년 6월 『시문학』을 발간하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해 창간호가 종간호가 된다.
한국 전쟁 이후 1955년 12월 첫 개인시집 『산도화』를 간행하였고, 1956년에는 부친이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폐결핵을 앓던 동생 영호가 세상을 하직한다. 시 「하관」은 아우 영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작품이다.
이때 뚜렷한 직장을 가지고 있지 않아 수입이 형편없었고, 일생 중 가장 많은 경제적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출판사에 기획을 해주거나, 많은 수필을 쓰면서 생활비를 벌었는데, 이때 『구름의 서정』(1956),『토요일의 밤하늘』(1958), 『여인의 서』(1959) 등의 수필집과 자작시 해설 『보라빛 소묘』(1958), 『문학강화』(1959) 등을 잇달아 펴냈다. 그러면서 시 창작도 활발히 하여 1959년 두번째 개인시집 『난, 기타』를 발간한다. 1962년 한양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되었고, 1964년 세 번째 개인시집『청담』, 수필집『행복의 얼굴』을 내기도 했다. 5·16으로 해산되었던 한국시인협회가 1965년 4월 재창립되었고 1968년에는 회장직을 맡게 되면서 후배시인들과 자신의 시집 발간에 힘쓰는데, 이때 많은 목월의 시집이 발간되었고 또 많은 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경상도의 가랑잎』(1968), 『어머니』(연작시집,1968), 『청록집 기타』(박두진, 조지훈과 공저,1968) 등이 있다. 1973년 10월에는 목월, 박남수, 김종길, 이형기, 김광림이 편집기획위원이 되어, 시 전문지 『심상』을 창간한다. 1976년에는 시집 『무순』을 발간했고, 1978년 3월 24일 평소처럼 새벽 산책에서 돌아온 뒤 가벼운 어지럼증을 느껴 자리에 누웠고, 지병인 고혈압으로 임종을 맞는다. 목월이 떠난 이듬해인 1979년에 부인 유익순과 장남 박동규에 의해 유고시집 『크고 부드러운 손』이 간행되었고, 1987년에는 유고시만을 모은 『소금이 빛나는 아침에』가 간행되었다.
Ⅱ. 시적 변모과정과 작품 경향
1. 초기시
박목월이 시단에 등단한 1930년대 말 1940년대 초기는 일제의 탄압과 통제가 극에 달하여 암흑기라 불리던 시기로 문인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당시의 문단적 상황은 1930년대 시문학파의 순수시운동과 모더니즘의 기교주의에 대한 반발로 생명파 시인들이 인간적인 문제와 생명의 본질에 관한 탐구에 주력하던 시기였다. 이즈음에 청록파는 생명파에 대한 지지 내지는 극복에서 대두되었다. 청록파는 자연과 향토적인 문제를 노래하였는데 박목월 또한 이 시기 작품 속에 ‘자연’이라는 소재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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