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 Antoinette 그녀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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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Antoinette 그녀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Marie Antoinette, 그녀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마리앙투아네트, 우리는 그녀를 프랑스 혁명에 대해 배우면서 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배웠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를 말아먹은 죄로 처형된 인물인데 그녀의 삶이 과연 비판 받기 마땅한 삶을 살았을까? 그녀가 프랑스에서 왕비로서 지내온 삶에 대해서 가볍게 살펴 본다면 그녀의 사치와 향락은 그녀가 프랑스에서 삶을 영위해나가기 위해 선택한 불가피한 방법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그녀는 결혼을 하고 3년이 지나서야 루이16세와 잠자리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그 3년간은 궁전에서 임신에 대한 모욕의 말을 듣고 심지어 어머니에게서도 압박을 받으며 살아 왔다. 임신에 대한 압박을 지속적으로 받은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사적인 영역을 확보하고자 하고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 했다. 그 당시 궁중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즐거움으로 그녀는 신발, 옷, 액세서리의 소비와 궁전 꾸미기 노름으로 하루를 보내게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녀의 엉뚱한 머리모양과 옷 장신구에 의해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녀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택한 유일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오스트리아 계집이 프랑스의 파멸을 몰고 올 것이라는 내용이 담긴 왕비에 대한 모욕의 선전물이 배포되고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반감은 더욱더 극심해 졌다.
이렇게 사건의 이면에 대해 살펴본다면 그녀에 대한 오해의 내용을 많이 찾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이다. 이 사건은 마리앙투아네트의 사치를 보여주는 사건이 아닌 그녀는 가장 억울한 피해자가 된 사건이다.

당시 목걸이 사건의 문제가 된 여성 마담 드 라모트는 몰락한 귀족과 방탕한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이 소년느 자크 드 생레미의 딸이었다. 그녀는 7살 때 요행을 만나서 거리에서 불랭비리에 후작부인에게 ‘발루아 가문의 혈통인 불쌍한 고아에게 적선 좀 하세요?’라는 구걸을 하면서 그녀의 삶은 타락의 길에서 벗어나기 시작 했다. 불랭빌리에 후작부인은 믿어지지 않는 왕손의 몰락에 마음이 움직여서 소녀를 자기 돈으로 기숙학교에 보내고 교육을 시켰다. 그녀는 악당인 아버지의 피가 흐르고 있는 자신이 수도원에 맞지 않다 생각하여 20살 때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서 바르 쉬르 오브에 갔다. 그곳 에서 잔은 예쁜 외모 덕분에 니콜라 드 라 모트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 생활에서 편안하게 소시민의 생활을 영위 하고 있었지만 발루아의 피가 흐르는 그녀는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려는 욕망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년 곧 사베른의 로앙 추기경 성에 들어가 그를 남김 없이 이용했다. 그리고 그녀의 욕망이자 목표 중 하나인 가문의 토지를 찾기 위해서 그녀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다. 베르사유의 인맥을 만들기 위해서는 로앙 추기경을 이용하는 것으로도 부족 하기 때문에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로앙추기경은 왕비의 미움을 톡톡히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왕비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 정신을 잃은 체를 하는 기절 소동을 몇 차례 벌였지만 이는 큰 성공을 가져 오지 못했다. 라 모트 백작 부인은 비록 왕비의 눈에 띄지는 못했지만 왕비의 주변을 맴돌았고 왕비와 친분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속이고 다녔다. 이러한 상황에서 목걸이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 라 모트 백작 부인은 베르사유 궁의 정원에서 창녀 마리 니콜을 창녀로 둔갑 시키고 저녁에 로앙 추기경을 만나게 하여 로앙 추기경이 라 모트 백작 부인의 말을 모두 믿게끔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베누스 숲의 밀회가 이루어 진후 라 모트 부인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 했다. 추기경에게 왕비가 가난한 궁내관들의 가족을 도와주고자 하여 6만 리브르가 필요하다고 말하며 돈을 요구하는 경우와 같이 추기경에게서 끊임 없이 돈을 요구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시 1784년 말 라 모트 백작 부인에게 왕실 보석상 뵈머와 바상주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왕비에게 팔 수 있도록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오게 되는 일이 발생 하게 된다. 이러면서 다이아몬드사건은 본격적으로 시작 하게 되었다. 그들은 본래 이 목걸이를 마담 뒤바리에게 팔 계획 이였지만 때마침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인해 죽는 바람에 팔지 못하게 되어 자금난을 시달리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다행히 루이 16세가 즉위하자 마자 왕비가 보석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바로 찾아 갔지만 왕비는 160만 리브라는 값에 놀라 사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하며 거절을 하였다. 그들이 다시 한번 찾아 갔을 때도 왕비는 목걸이를 사지 않겠다고 전에도 말했어요 나는 분명히 거절을 했어요 그러니 다시는 이 얘기를 꺼내지 마세요 라고 하며 완강하게 거부를 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팔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하게 되며 점차 조급해 지기 시작하여 라 모트 백작 부인에게 찾아 간 것이다. 당시 라 모트 백작 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연락을 하여 왕비가 왕 모르게 목걸이를 사고 싶어 하며, 왕비가 세 달에 한번씩 나누어 목걸이 값을 지불하고 싶어한다고 그를 속였다. 그리고 왕비가 다른 자들에게 비밀이 누설되기를 원치 않고 로앙 추기경이 해결해 주기를 원한다고 말 하였다. 결국 로앙 추기경은 위조된 왕비의 서명이 들어있는 계약서를 보석상들에게 보여주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매 하게 되었다. 라모트 백작부인은 왕비가 성촉절 행사에 그 목걸이를 하고 나타나 따스한 눈길을 보내 줄 것이라고 말을 하며 로앙 추기경을 끝까지 속였다. 라모트 백작부인은 그 목걸이를 마구 해체하여 팔아서 많은 돈을 얻게 되었다. 라모트 백작부인은 후에 바르 쉬르 오브로 갔고 그 뒤부터 풍요로운 돈을 가지고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로앙 추기경과 라모트백작부인은 결국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되면서 보석상 뵈머와 바상주가 이러한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왕비에게 직접 호소하기로 결심하고 이 모든 사건에 대해서 왕비에게 편지를 써서 알린 것이다. 왕비는 곧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고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재판의 과정은 매우 복잡하고 오랜 기간을 걸쳐서 이루어졌지만 결과적으로 나온 판결은 로앙 추기경의 경우는 모든 혐의를 벗었고 라모트 백작부인의 경우는 콩시에르주리 감옥의 문 앞에서 목에 밧줄을 걸고 발가벗겨 형 집행인의 태형과 장형을 받게 하고 살페트리에르 감옥에 평생 가두며 재산을 몰수 하겠다는 판결이 난 것이다. 이러한 판결에서 시민들은 로앙추기경의 무죄선언에 대해 기뻐하지만 왕비가 관련이 없다는 판결에 대해서 왕비가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냐는 시민들의 의심을 받게 되고 오히려 과장되고 왜곡된 소문들로 인해 이 사건이 마리앙투아네트의 문제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전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 당시 그녀에 대한 많은 오해의 내용들을 떠올리며 이 그림을 보면 여왕으로서 그녀가 시민들 앞에서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하는 모습을 보며 그녀의 수치심을 느낄 수 있고 그녀에게 지나친 대우였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