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 3 평화공원을 다녀온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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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 3 평화공원을 다녀온 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주 4.3 평화공원을 다녀온 후
나는 4.3에 관한 보고서를 4.3 평화공원에 있는 기념관의 전시내용을 토대로 4.3의 배경과 순서, 사건 이 후의 일들을 역사적 순서대로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4월 17일 평화공원 안에 있는 기념관에 들려 4.3에 대해 자세한 사건 배경과 전말 등을 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평화 기념관 제 1관은 동굴모형으로 되어있는데 이 동굴모형은 4.3 당시 주민들에게 천혜의 피신처로 활용된 공간을 모티브로 한 것인데 이 긴 동굴모형은 4.3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첫 관문이라고 소개된다. 즉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동굴모양의 터널을 지나가는데 뭔가 섬뜩하기도 했고 으스스하기도 했다. 그 동굴 구석구석에는 깨진 도자기 같은 것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간간히 박쥐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 것 들이 뭔가 귀신의 집을 생각나게 했고 터널 중간 쯤 나오는 백비, 즉 비문 없는 비석은 귀신의 집에 있는 관같이 느껴져서 더 무섭고 소름이 끼쳤다. 나중에 어두운 그 동굴모양의 터널을 나와 밝은 곳에서 이 설명서에 나온 내용들을 읽어보니 왜 그렇게 어둡고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했는지, 또 그 긴 터널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이런 분위기를 연출한 모형에서 나 또한 무서움과 섬뜩함을 느꼈는데 4.3사건 당시 실제 이런 동굴에서 피난생활을 한 제주도민들은 얼마나 더 무섭고 두려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제 1관을 지나 제 2관에 들어오면 제주도민과 미군 간의 갈등의 시작부터 미군정의 탄압을 전시해 놓았다. 또 2관의 맨 처음에는 1945년 해방 직후 4.3의 배경부터 천천히 설명해주고 있었고 당시 폐허가 된 제주도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어서 이해가 더 잘 되었다. 1945년 9월 22일 제주도는 인민위원회를 결성 했다. 해방 이후 폐허가 된 제주도를 다시 살리기 위해 결성된 것으로 미국정과도 협력관계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이 인민위원회는 도민들이 직접 구성한 읍, 면, 리 단위까지의 도 전체 조직으로 커졌고 1947년 3월까지 공식 조직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미군정은 인민위원회 자체를 공산주의 세력으로 규정하고 탄압했지만 사실 인민위원회는 구성원 자체가 좌, 우익을 모두 포함하여 구성되었다고 한다. 당시 제주는 자치의 열망으로 달아올라있었고 자주독립을 위해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들을 했다. 인민위원회는 실질적으로 각 면과 마을 행정을 이끌어갔고 주로 치안활동과 농사법 교육, 학습회, 야학운영 등의 활동을 했다. 특히 치안활동과 마을마다 학교세우기 운동을 하면서 자치활동뿐만이 아니라 각종 교육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정치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고 좌우 세력 간의 갈등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정치 지도자들의 갈등이 악화되면서 통일정부의 꿈도 점점 멀어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 우리나라의 신탁통치가 언급된 모스크바 3상회의가 열렸고 이 3상회의에서 결정된 그 내용이 특정 언론에 의해서 소련은 38도선 분할을 구실로 신탁통치를 주장했지만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주장했다고 왜곡되었고 그 왜곡된 정보에 의해 격렬한 반탁운동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 내용은 어디서도 배우지 못한 새로운 내용이었고 만약 이 언론이 정보를 왜곡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분단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남기도 했다. 그 이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있었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국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했기에 그 회의는 곧 결렬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제주도에서도 제 28주년 3.1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행사장은 곧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 인산인해 속에서 경찰이 탄 말에 어린아이가 치이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 장면을 본 주변 사람들이 돌을 던지며 달려들자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한 경찰들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숨지고 6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주도민들은 직장인, 공무원 등 95%가 참여한 3.10총파업으로 항의를 했고 이런 것들이 결국 4.3 사건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제주도는 ‘레드 아일랜드’로 단정 지어졌다.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북청년단이 제주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서북청년단이란 북한에서 남하한 극우청년단체로 미군정은 이 서북청년단의 극우적 성향을 이용해 미군정에 반대하는 지역에 이들을 투입시켰고 이들은 경찰 보조기능을 하면서 갈취와 폭행을 하기도 했다. 서북청년단은 제주에 들어와 경찰, 행정기관 등 여러 기관을 장악하였다. 곧 이들은 ‘빨갱이 사냥’을 한다는 구실로 테러를 했고 이는 4.3 사건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다음 제 3관에서는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의 과정과 배경을 보여준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 오름에 봉화가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위원회가 주도한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무장대는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단체들의 집을 습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장대의 실체는 빈약한 병력과 좋지 않은 조약한 무기를 가신 작은 모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무장대는 미군정에 협력하지 않은 나쁜 무리로 부풀려지고 왜곡되어 퍼져나갔다. 4월 17일 미군 군정장관은 무장대의 항복을 유도하도록 지시했고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 노력하던 김익렬 연대장은 22일 평화협상을 제안하는 전단지를 만들어 살포했다. 그 결과 2월 28일 연대장과 무장대 간의 평화협상이 성사되었다. 하지만 전투 중지 사흘 만인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 우익청년단체원들이 들이닥쳐 민가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폭도의 소행’이라고 몰고 갔으나 김익렬 연대장은 곧 우익청년단원들이 저지른 범행임을 밝혔다. 하지만 미국 방첩대는 이 보고를 묵살한 채 경찰의 주장만 받아들였고 김익렬 연대장은 평화협상을 유지하려 했으나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함에 따라 평화협상은 결국 무산되었다. 그 후 경찰 위주의 진압작전이 경비대에게 넘어가면서 처참한 학살이 계속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미군정에 의해 남한은 5.10선거를 실시하게 되고 제주도민들은 이 선거 날에 산에 오르는 모습으로 선거를 거부하게 된다. 분단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거를 거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선거는 과반수 미달로 무효화가 되었다. 결국 미군은 토벌작전을 하게 되고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실시하게 된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을 하게 되고 제주도는 결국 학살로 인해 초토화가 되게 된다.
제 4관에서는 ‘불타는 섬’이라는 이름으로 초토화 작전과 대량학살, 그 이후 한국전쟁 기간 학살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제 9 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전도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하고 이 포고에 위반하는 자는 이유를 묻지않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에 중산간 마을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학살이 진행되었고 중산간마을의 36% 이상이 불에 타 사라졌으며 이 과정에서 남아있던 주민들이 집단으로 희생되었다. 중산간마을 주민들은 토벌대의 학살이 끊이지 않아 한라산으로 피신했다. 이 때 추운 겨울 한라산으로 피신한 많은 피난민들이 굶어 죽고 얼어 죽는 등 처절한 피난생활을 견뎌야만 했다. 이 기념관에서는 이 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나는 어쩐지 이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과거에 거대한 감옥이자 무서운 학살 터였다는 이 말이 너무 무서웠고 안타까웠다.
1949년 3월 말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홍 대령은 산에 숨어있는 피난민에게 내려와 귀순하면 과거 행적을 묻지 않고 살려주겠다며 선무공작을 펼쳤다. 이 소문이 퍼지자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피난민들이 흰옷을 나뭇가지에 묶어 만든 백기를 앞에 들고 산에서 내려왔다. 이 하산민들의 대부분이 노인과 부녀자와 어린이들이었다. 그러나 유재홍 대령의 말과는 달리 하산민들 가운데 일부 노약자들은 풀려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수개월동안 수용소에 감금된 채 심문을 받았다. 그 사이 병들어 죽는 사람도 생겨났고 그 집단 수용소 안에서 아기가 태어나기도 했다. 당초 선무공작을 주도했던 유재홍 대령이 제주도를 떠나자 제2연대장 함병선은 하산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겼다. 이 군법회의는 최소한의 법 절차도 거치지 않은 불법적인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하산민들 중 젊은 남자들은 사형이나 무기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고 여성들도 가족 중 남편이나 아들이 사라졌다면 도피자 가족이 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결국 많은 주민이 총살되거나 형무소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제 5관에는 4.3사건 이 후 복구와 정착, 후유증 그리고 진상규명운동 등 4.3의 아픔과 회
복 과정을 보여준다. 4.3사건과 6.25전쟁 등으로 폐허가 된 마을을 살아남은 제주도민들이 맨손으로 일으켜 세웠다. 함병선 제2연대장은 철수에 앞서 중산간마을 복구사업을 실시했다. 첫 사업으로 선정된 지역은 봉개리였는데 복구 당시 ‘함명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지만 그 후 주민들은 다시 마을 이름을 되찾았다. 중산간 마을 재건사업은 전쟁 후 혼란과 자금부족으로 미뤄지다가 한라산 금족령 해제 후 실시한 ‘난민정착사업’을 통해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4.3사건 이후에도 제주도민들은 냉전과 정치공작의 희생양이 되었다.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까지 받은 제주도 출신 교육계 원로 등 제주사람 11명이 제주도 출신 재일동포를 한 번 만났다는 이유로 고정간첩으로 조작되어 고문을 받았고 풀려난 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도 있었고 한 중학교 교장은 재일동포로부터 학교건물 증축 비를 받았다가 간첩 혐의로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전기고문과 물고문, 손바닥에 못을 박거나 칼로 생살을 도려내는 등 가혹한 고문을 받았던 주민들이 현재까지도 그 후유증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글을 읽고 마음이 너무 아팠고 안타까웠다.
2003년 10월 15일 ‘국가 공권력의 인권유린’으로 규정한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었고 10월 3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공식 사과했다. 2006년 10월부터 ‘4.3 희생자 유해발굴사업’이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당시 목격자와 유가족들의 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