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의 치숙을 읽고 친일문학을 한 문학가들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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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채만식의 치숙을 읽고, 친일문학을 한 문학가들을 찾아.
근현대사 과제 때문에 수능 전에 읽었던 채만식의 소설집을 꺼내서 읽게 되었다. 그의 소설은 사실주의 소설로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기에 좋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등장하는 ‘나’는 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일본인과 결혼하여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것이 꿈이고, 현재의 생활에 불만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일본인의 말을 국어로 생각하여 일본어를 써야한다고 생각을 하고 생활 방식에 있어서도 일본인의 방식을 따르고자 한다. ‘나’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지만 ‘나’의 오촌 고모부인 ‘아저씨’는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 다른 사람이다. ‘아저씨’는 사회주의자로 ‘나’가 봤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본인의 지배 밑에서 그냥 주는대로 받아먹고 시키는대로 하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는데 굳이 일본인처럼 사는 것을 거부하고 말도 안되는 불한당 같은 사회를 원하며 대학교까지 졸업한 지식인이 저러고 있으면서 ‘아주머니’를 고생시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비판에 불평만 한다. ‘나’는 부모님을 잃고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아저씨는 아주머니를 쫓아내고 다른 여자와 함께 살아 보기도 했지만 전중이를 살았던(징역꾼) 아저씨를 받아준 것은 아주머니 였고 몸이 아파 누워있는 동안에도 삯바느질과 같은 일을 하며 내조했다. ‘나’는 아주머니에게 일본인과의 개가를 권하기도 했지만 말이 통하지는 않았다. 감옥에서 나와 다 죽어가는 아저씨를 지극정성으로 살려냈는데, 그리고도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아저씨가 나는 이해도 되지 않고 대학을 졸업한 지식인이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하지 않고 명예 때문에 막노동도 하지 않는 그런 무기력한 아저씨로 밖에 안보인다. 내가 보는 사회주의는 ‘부자가 가진 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반란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불한당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에게 노동력 없이 댓가를 주게 되면 더욱더 게으르게 되고 모든 사람이 다 게을러 진다는 것, 그리고 부자들이 망하면 나라는 망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나’는 아저씨가 사회주의 때문에 사회에 불만을 품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일본여자와 결혼하여 일본인 주인 밑에서 일을 하면 그냥 어지간한 돈벌이는 되는 것이고 일본인 이름을 가지고 일본인처럼 살고 국어를 재미있는 일본어로 쓰면 탄압을 받지도 않는 다는 것이 내 신조이고 내 삶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본인이 되어 살다보면 돈을 모을 수 있고 돈을 모아 부자가 되어 사는게 내 목표이고 계획인데 사회주의를 부르짖는 아저씨가 나는 끔찍하다. 우연히 본 잡지에 아저씨가 쓴 경제와 사회에 대한 글을 보고 사회주의와 경제에 대한 대화를 시작한다. 아저씨는 일본인 여자와 결혼하여 살겠다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는 아저씨를 이해하지 못하고 실망만 한 채 이야기는 끝난다.
제목에서부터 ‘치숙’은 어리석은 아저씨를 뜻하며 아저씨를 비판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극의 진행 내내 아저씨를 비판하고 일본인처럼 살기 위해 노력한다고 한다. 5년간 사회주의라는 이념 아래에 나라의 해방을 위해 옥살이를 한 아저씨가 존경의 대상으로 보여야 하지만 나의 비판으로 아저씨가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아저씨가 조롱의 대상이고 비판의 대상이 아닌 나가 비판의 대상이고 부정적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마냥 아저씨를 옹호하는 것만은 아니다. 아저씨는 무능한 지식인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아저씨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너무 이상적인 모습으로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회주의인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조카와 아저씨의 대화에서 조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를 대변해 주고 있다. 이런 부분에서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회주의를 생각하고만 있는 아저씨나, 일본인처럼 살고자 하는 나나 비판 받기는 마찬가지이다.
이 글을 쓴 채만식은 일제 시대에 풍자 소설, 사실주의 소설, 농민 소설로 알려진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1902년 전라북도에서 상당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자라던 시기에 우리는 일본의 토지 수탈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인의 매점매석이 성행하였다. 그가 살던 전라북도는 평야지대로 일본인 지주와 자본가들에게 토지를 몰수당해 그의 젊은 시절은 경제적 어려움이 뒤따랐다. 또한 채만식의 고향은 곡창지대로 교통도 편리하여 물자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일본의 수탈행위가 더욱더 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유학을 갔다. 본래 채만식의 집안은 선비도, 하층 빈민도 아니고, 항일 의식이 투철한 것도 아니고, 친일을 한 것도 아니지만 시대에 발 빨랐던 부친의 영향으로 가게 되어 고향마을에 커다란 충격을 가져 와 다른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학교 때 채만식은 3.1운동을 겪고 부모들의 강요로 구식여성과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은 행복하지 못했고, 그 후 신여성을 새로 아내로 맞아 일생을 마친다. 그는 1922년 와세다 고등학원에 입학하여 종교와 문학문제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그러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조선인 대량 학살 사건이 일어나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가난에 시달리면서 살아야 했다. 귀국 후 여러 책을 썼지만 검열에 걸리는 바람에 발표하지 못했고 ‘레디메이드 인생’이 발표되기 전까지는 본격적인 집필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신문기자로서의 결벽증을 가지고 있었다. 유능하지만 너무 날카롭고 비타협적이라 기자로서의 자질은 충분하지만 인간관계가 원만하지는 못했다. 그는 기자 일을 하면서 현식에 대한 이해, 진보적이면서도 비판적인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 작품의 중심소재, 주제들이 역사적이고 민족적이며 사회적인 것들이 많게 되었다. 1930년대의 역사적 현실은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가 바뀌어 가는 시기이다. 세계를 일본의 땅으로 만드려는 일본의 야욕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노동, 자원을 약탈당하고 그들의 상품의 시장이고, 병참 기지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았다. 일제의 사상적 통제 또한 유난히 심하였고, 이때 민족의 상황에 대한 논의 자체가 억압되었다. 채만식은 식민지 상황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모순들에 대해 진지한 태도로 접근하고자 했고 이 때 채만식의 또다른 소설인 탁류, 태평천하, 치숙, 소망등이 나오게 되었다. 그 후 채만식은 친일의 문학 대열에 끼여서 강제이든 자발적이든 간에 친일 문학을 썼다. 해방 후 ‘민족의 죄인’이라는 소설로 자신의 행위를 반성하고 5년 후 숨을 거두었다.
이 시기에 많은 문학가를 포함한 예술가들은 친일의 반열에 들어서게 된다. 거기서 큰 이유 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근대초극론’이다. 첫째로 1940년 3월 중국에서는 왕정위 정부가 수립되어 일제에 협력되는 사건이다. 중국인이 자발적으로 일본 중심의 동양사회에 편입되는 것을 보고 조선인들도 일본 중심의 동양건설을 인정해 버리는 것이다. 둘째는 1940년 6월에 일어난 독일에 의한 파리의 함락이다. 프랑스 파리는 근대의 정신으로, 프랑스혁명으로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라는 체제를 구축하였는데, 이 파리가 함락되었다. 이는 근대의 한계를 나타낸 것으로 신체제의 필요성을 보여준다고 한다. 이때 유럽의 신체제는 나치의 독일, 아시아는 일본이 중심이 되어 존재한다. 일본은 근대를 극복하는 동양을 선호했고, 근대가 유럽이라면 일본은 근대초극 이라는 논리로 일제의 전쟁을 정당화했다. 이러한 이론을 따른 사람이 바로 ‘치숙’의 작가 채만식이다. 채만식은 자신의 상황, 궁핍하고도 너무 힘든 한 개인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면서 이러한 이론을 통해서 자신의 친일 문학 행위를 정당화 시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른 사람은 채만식 뿐 아니라, 서정주, 최재서를 들 수있다.
최재서는 어떤 사람일까? 최재서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경성대학 영문과를 나와 런던대학교에 유학을 하고 돌아와, 영문학을 가르치고 문학평론을 한 사람이다. 그는 1939년 《인문평론》을 창간하여 친일적인 글을 쓰고, 1941년 친일문학지 《국민문학》 주간,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를 역임하면서 천황숭배론자가 되었다. 8 ·15광복 후 연세대학교 ·한양대학교 등의 교수를 지내는 동안은 평론을 떠나 학문에 전념하였다.
서정주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시인 중 한 사람이다. 서정주는 과 같은 유명한 시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아는 시인으로서의 면모와는 또다른 친일 문학가의 모습이 잇다. 그는 일제 말기에 일제에 대한 찬양과 황국 신민화 정책의 선전에 온갖 정성을 쏟아 부은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 싸우다 죽을 것을 강권하고, 일본의 뒤를 쫓으며 종군기사를 썼다. 그의 친일 행위는 “오장 마쓰이 송가”에서 아주 잘 들어난다. 이 시는 1944년 총독부 기간지인 [매일신보]에 발표한 대표적 친일시이다. 그는 평범한 시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친일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는 것은 1942년 7월 평론[시의 이야기-주로 국민 시가에 대하여]를 다츠시로 시즈오이라는 창씨명으로 [매일신보]에 발표하게 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최재서(崔載瑞)의 주선으로 친일 어용 문학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의 편집일을 맡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친일 작품들을 양산하기 시작한다. 1942년부터 1944년 사이에 . 이렇게 많은 시들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작품들은 학병 지원을 권유하고 징병을 정당화하고 신성화 시키는 작품이고, 대부분 일제의 군국주의 정책에 동조해야하는 당위성을 드러내고, 태평양 전쟁을 마땅히 해야만 하는 전쟁으로 미화시킨다. 그는 자신의 행적에 대해 “나는 그때 일본이 200년은 갈 줄 알았다”라는 말을 한 것은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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