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국어작문]채만식의 인생과 문학세계(A+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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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학국어작문]채만식의 인생과 문학세계(A+리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글

2. 채만식의 삶과 문학관

3. 채만식 문학에 나타나는 부정의 양상
1) 초기의 작품(1923~1933)
2) 爛熟期의 작품(1934~1938)
3) 苦惱期의 작품(1939~1945)
4) 해방 이후의 작품(해방 직후~1950)

4. 마치는 글
본문내용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가 추천되어 문단에 등장한 채만식은 정작 20년대에는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다가 비로소 30년대에 들어서야 많은 문제작들을 발표한다.
1930년대는 일본이 만주를 강점하고 다시 중국에 진입하여 결국은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는 도화선을 만든 시기였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 대한 일본의 억압과 수탈은 더욱 가혹해져서 경제적으로는 민족의 궁핍화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고, 문화적으로도 일제의 검열 제도가 강화되어 예술가들은 작품의 창작 활동에 극도의 제약을 받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문단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약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식민지 치하의 작가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그리고 때때로는 그 한도를 넘어서서 자신들이 보고 느끼고 경험한 것을 탁월하게 표현한다. 이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채만식이다. 李注衡의 지적대로 작가 채만식은 식민지 시대에서 해방기에 걸쳐 한 사람의 탁월한 시대적 증인으로 살아갔다. 채만식의 소설 작품들은 시대적 증인으로서의 발언을 기록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흔히 많은 평론가들이 채만식의 소설 세계를 ‘풍자 소설과 동반 작가의 경향으로 규정’하고,그것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레디 메이드 人生」이나 「탁류」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채만식의 문학을 총체적으로 살피지 못하고 하나의 단순한 틀 속에 가두어 평가한 면이 강하다. 이에 대해 丘仁煥은 「太平天下」나 「痴叔」과 같은 작품에는 짙은 諷刺를 볼 수 있지만 「濁流」에선 별로 그런 것을 찾아 볼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일부 작품의 경향을 全作品에 확대하여 적용시키려는 것은 作品硏究를 외면한 안이한 처사라고 비판하고 있다.
Ⅱ. 채만식의 삶과 문학관
1902년 6월 전북 옥구에서 채만식은 대대로 부농인 채규섭(蔡奎燮) 씨의 9남매 중 5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백릉(白菱). 채옹(蔡翁).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임피 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유학하여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2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하였으나 1923년 관동(關東) 대진재 사건이 일어나 조선인 탄압이 극도에 이르자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잠시 강화의 사립 학교 교원을 지내다가 곧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로 입사한다. 그 이듬해인 1924년 단편 가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추천되어 소설가로 등장한 이후 채만식은 언론계와 창작 생활을 병행하면서 왕성한 청년기를 보낸다.
1936년 이후 채만식은 오랫동안 몸담아 오던 기자 생활을 그만두고 그때 개성에서 금광업에 손을 대고 있던 중형(仲兄) 준식(俊植)을 찾아간다. 도시에서의 틀에 박힌 일상 생활을 털어 버린 채 창작의 의욕을 불태우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꿈을 갖고 찾아갔던 개성은 그에게 만족할 만한 조건을 제공해 주지 못했다. 즉, 중형의 광산업이 여의치 못하여 생활은 날로 내리막길이었고, 식민지 시대의 지식인이 안고 있었던 고뇌는 결코 지방에서도 해결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채만식은 서울을 떠난 지 1년 만에 가난과 실의와 현실적인 부조리에 대한 저항감을 안고 다시 상경하고 말았다. 그의 단편 에 그려진 것처럼 이미 그의 집안은 어릴 때의 부농에서 차츰 빈궁해져 버렸고, 서울에 온 그에겐 벅찬 현실의 각박함 속에서 생활의 고민이 하나 더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장편 몇 편을 쓴 채만식은 1940년대에 접어들자 日帝의 탄압에 못 이겨 본의 아니게 민족 정서에 어긋난 글들을 쓰게 된다. 당시 문학인들 거의가 다 가담했던 친일화 경향에서 채만식도 자유롭지 못한 채 「추모되는 池麟泰 大尉의 自爆」, 「女人戰記」 같은 장편 등을 쓴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사회적인 문제와 민족 의식이 강했던 채만식은 40년대의 질식할 것 같은 탄압의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1945년 초 낙향한다. 그는 고향에서 이미 옛 소지주의 아들 신분을 잃어버린 가난한 작가로서 아버지조차 세상을 떠났기에 실의와 낙망 가운데 일체의 집필을 중단하고 마작으로 우울한 나날을 보낸다. 울분을 마작으로 보내던 중 맞이한 해방은 그에게 새로운 창작의 계기를 준 전환점이 되었으나 이미 채만식은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
본 자료는 연세대학교 교양필수과목 [대학국어작문]수업 중간과제로 제출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던 리포트입니다. 많은 도움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