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해석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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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해석의 차이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해석의 차이
1.서론
이 글(2장)에 대해서 짤막하게 소개 및 요약.
글의 특성 소개
2.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해석의 차이
2.1 부르주아계층의 시각
2.2. 민중의 시각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 광해군을 해석하는 두 가지의 다른 시각
3. 미술작품으로 보여진 역사
-김홍도와 신윤복
* 참고자료 - 두 화가의 그림
4.민중들을 대변한 사람들
4.1 민중화가 : 도미에와 최경태, 최병수
4.2 문학인 : 김수영, 신동엽..(주 1)
* 참고자료 - 도미에 의 작품
5. 역사 속에서 민중들이 생각을 표출한 방법
- 판소리 탈춤 소설(홍길동전) (주 2)
6. 결론
요약 정리 및 우리조의 생각.
♧토론주제
민중에서 바라보는 역사와 지도계층(지식인, 왕조실록 사관 등)역사 모두 의미가 있다. 어떠한 것이 더 진실한 역사라고 보는가. 민중이 바라보는 역사는 더 생생할 수도 있지만 더 과대되어 표현될 수도 있다. 지도계층이 바라보는 역사는 더 정확한 표현으로 쓰여졌으므로 해석하는 것도 더 정확히 해석될 수 있으며 기록이 잘 보관되어있다. 그러나 사회적 여건상 은폐나 왜곡될 위험도 있다.
1.서론
로버트 단턴의 은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빨간 모자 소녀’의 원본, 고양이 학살 이야기, 도시에 대한 기묘한 묘사, 경찰 감독관이 보관한 신기한 서류철 이야기 등을 통해, 18세기 유럽의 사고를 모색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과는 다르게, 농촌 이야기꾼이나 서민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역사를 해석해나가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제2장(노동자는 폭동한다 :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대학살)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장은 18세기 유럽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계층에 대한 불만을, 주인집 고양이를 포함한 고양이를 학살하면서 해소한다는 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이 글은 한 노동자의 이야기로, 이 사료를 가지고 역사를 해석해나가는 방식으로 쓰여져 있다. 이러한 사료가 해석하기에 너무 빈약하지 않은가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일단 여기에서는 그 논란은 배제한 채 생각해보기로 한다. 지도계층이 해석하는 역사와 민중이 해석하는 역사를 비교해보고 과연 어떤 것이 진실한 역사라고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또 민중의 사고가 표출된 사례를 살펴보고 당시 사회적 배경을 추론해보고자 한다.
2.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 따른 해석의 차이
역사는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역사를 해석하는 방법은 분류하는 것에 따라 다양하게 나뉠 수 있지만, 여기에서는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의 신분으로 나눠보기로 하겠다. 즉 지도계층(부르주아)에서 보는 역사와 민중들이 보는 역사로 분류하겠다. 먼저 우리 한국사를 보면 지도계층, 즉 부르주아계층의 입장에서 쓰여진 역사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삼국사기와 등이 있다. 비록 현대에 와서는 사대적인 경향이 강하고 객관적이지 못한 면이 많다는 이유로 삼국사기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지만, 당대 귀족이 저술하였다는 점에서, 여기에서 다루어 볼 만한 역사서이다.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신라를 정통으로 한 기전체방식으로 편찬한 역사서이다. 귀족이 썼기 때문에 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게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많다. 그리고 유교적 이념이 가미되어서 유교적 내용으로 되어있다. 반면, 삼국유사는 일연이라는 스님이 전해져오는 향가, 설화, 야담, 전설 등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만든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로 고조선에 대해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이 삼국유사는 아무래도 스님이 썼기 때문에 불교적 이념이 가미되어 불교적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두 역사서 차이의 근본은 바로 글쓴이의 위치에 있다. 바로 신분의 차이였다. 이렇듯, 같은 역사라도 그 내용을 보는 작가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기술되는 것이다.
광해군을 보면 또 알 수 있다. 조선의 사관들은 광해군을 폭정을 일삼은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왜 그가 폭군인 이유는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의 반란을 합리화한 측면이 강하다. 오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들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 외교론과 현실 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 이론을 완전히 꽃 피우지도 못한 채 밀려난 불행한 왕이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 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것과, 둘째는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내 건 이 명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우선 이들이 중국의 흐름에 둔감해 시대적 대세를 잃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명은 이미 기울고 있는 나라였고 청은 일어서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 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 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대명 사대주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 관계를 맺는 치욕을 겪게 된다. 다음으로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비롯해 능창군, 인목대비 등의 왕권 위협 세력들을 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아간 부분이다. 폭정이란 원래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으나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 일은 거의 없다. 그는 오히려 민생 구제에 주력하여 민생 경제를 일으키는 데 전력을 쏟은 왕이었다.
조선 정치사를 볼때 이른바 성군 내지는 명군으로 일컬어지는 왕들 역시 자신의 정적 세력 제거에는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람이 태종과 세조였다. 태종은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죽였고 동복 형제도 유배시켰으며 또한 계모 강씨의 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자행하고, 심지어 장자인 양녕이 왕이 될 인물이 못된다 하여 폐세자를 단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쳐 관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냈으며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철저한 심복 정치를 실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