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회의이해 - 64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바람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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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회의이해 - 64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바람을 기원하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제주사회의 이해
64년이 지난 지금 새로운 바람을 기원하며
4.3전야제에 가기 전 나는 전야제에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메세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 2학년 때 ‘한국사의 재조명’이라는 과목을 수강할 당시 공부 했던 자료들을 읽어보기도 하고 제주4.3사건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였다. 제주 4.3사건에 대해서는 제주4.3연구소에 자세히 나와 있었다. 그 설명들을 추려보았다.
제주 4.3사건은 한국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의 배경은 다양한 원인이 결합되어 있어 하나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독립 이후 급격한 인구변동과 광복에 대한 초기의 기대와는 달리 귀환인구의 실직난, 생필품 부족, 콜레라에 의한 수백 명의 희생, 극심한 흉년 등의 악재가 겹쳤고, 미곡정책의 실패, 일제경찰의 군정경찰로의 변신, 군정관리의 모리행위 등이 큰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이러한 수많은 요인들 중 4.3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그 것은 경찰이 시위 군중들에게 실수로 발포해 6명이 죽고 8명이 중상을 입은 3.1절 발포사건이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희생자의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주민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경(反警)활동을 전개했고 경찰발포에 항의하여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합동 총파업인 ‘3·10 총파업’이 일어났다.
사태를 중히 여긴 미군정은 조사단을 제주에 파견, 이 총파업이 경찰발포에 대한 도민의 반감과 이를 증폭시킨 남로당의 선동에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사후처리는 ‘경찰의 발포’보다는 ‘남로당의 선동’에 비중을 두고 강공 정책을 추진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사람들로 교체됐고,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 등이 대거 제주에 내려가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검속 한 달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4·3’ 발발 직전까지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됐다. 테러와 고문이 잇따랐다. 1948년 3월에는 일선 지서에서 잇따라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고 이때 남로당 제주도당은 조직 노출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세력들은 무장대가 되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12개 지서와 우익단체들을 공격했다. 이들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단정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미군정은 초기에 이를 ‘치안상황’으로 간주, 경찰력과 서청의 증파를 통해 사태를 막고자 했으나 사태가 수습되지 않자 경비대에 진압작전 출동명령을 내렸다.
한편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무장대측 김달삼과의 ‘4·28 협상’을 통해 평화적인 사태 해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평화협상은 우익청년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 등으로 깨졌다. 미군정은 제20연대장 브라운 대령과 24군단 작전참모 슈 중령의 제주 파견, 경비대 9연대장 교체 등을 통해 5·10선거를 성공적으로 추진하려고 노력했으나 전국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되었다. 그러자 미군정은 브라운 대령을 제주지구 최고사령관으로 임명, 강도 높은 진압작전을 전개하며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후 제주 사태는 한때 소강국면을 맞았다. 무장대는 김달삼 등 지도부의 ‘해주대회’ 참가 등으로 조직 재편의 과정을 겪었다. 군경 토벌대는 정부 수립과정을 거치면서 느슨한 진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소강상태는 잠시 뿐이었다.
남한에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 또다른 정권이 세워짐에 따라 이제 제주도 사태는 단순한 지역문제를 뛰어 넘어 정권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다. 그런데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의 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이에 앞서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중산간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계엄령 선포 이후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중산간지대에서 뿐만 아니라 해안변 마을에 소개한 주민들까지도 무장대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 그 결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입산하는 피난민이 더욱 늘었고, 이들은 추운 겨울을 한라산 속에서 숨어 다니다 잡히면 사살되거나 형무소 등지로 보내졌다. 심지어 진압 군경은 가족 중에 한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 그 부모와 형제자매를 대신 죽이는 ‘대살(代殺)’을 자행하였다.
12월 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함병선 연대장의 2연대도 강경 진압을 계속하였다. 재판 절차도 없이 주민들이 집단으로 사살되었다. 가장 인명 피해가 많았던 ‘북촌사건’도 2연대에 의해 자행되었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진압·선무 병용작전이 전개되었다.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다. 그해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의 사살로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또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되었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은 아직도 그 시신을 대부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禁足)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이로써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실로 7년 7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4.3에 대한 자료들을 읽어보고 피해자 인터뷰 동영상도 보면서 제주4.3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되새겨 보니 역시 안타까움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소설을 읽기로 결심해 몇 일 전부터 ‘순이 삼촌’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정감 가는 제주도 사투리로 소설의 시작을 연 것이 참으로 신선했다. 4.3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제재로 소설을 쓴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슴 한 곳이 아릴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재밌게 느껴졌던 처음과는 달리 소설을 읽을수록 정말 가슴이 아팠다. 역사적인 사건으로서 4.3을 배울 때는 ‘그저 이런 사건이 있었구나, 앞으로 이런 사건은 다시 없어야 겠다.’ 정도로 느꼈었는데 현기영의 ‘순이 삼촌’으로 다시 본 4.3은 훨씬 잔인했다. 비록 소설이지만 한 개인의 삶 속에서 4.3을 다시 바라본 그 잔혹함이 소름끼쳤다. 그런 치 떨리는 소름을 안고 나는 4월 2일 문예회관에서 하는 4.3전야제 ‘그 해 여름처럼, 바람이 분다.’에 참석했다.
사실 나는 4월 3일 제주4.3평화공원에서 하는 위령제에 참석하고 싶었다. 물론 모든 행사가 다 의미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위령제가 가장 공식적인 행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수업이 있어서 위령제는 포기하고 전야제를 택했다. 하지만 이 날마저 수업이 늦게 끝나는 바람에 아쉽게도 처음부터 관람하지는 못했다.
4월 2일 이 날 바람이 엄청 세게 불었다. 학교에서는 진짜 몸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문예회관에서의 바람은 조심스러운 분위기의 전야제라 그런지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문예회관 대극장에 들어서니 환환 불빛과 4.3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극장 쪽에는 ‘제주 4.3 3,000 행방불명 희생자. 수난의 경로’라는 제목이 쓰여진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안내책자를 받고 그 현수막 앞에 잠깐 서서 읽어보았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전국 각지에 형무소에 끌려 가 겪은 수난에 대해 사진과 그 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그야말로 양민인 제주도민들이 영문도 모른 채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고 희생되었다는 사실이 또 한번 소름이 끼쳤다. 4.3을 ‘광란의 시대’, ‘피의 시대’, ‘미친 시대’등으로 불리는 이유도 다 그 때문일 것이다.
현수막과 사진들을 다 보고 나서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업이 늦게 끝났기도 했고 대극장 로비에서 사진들을 구경하느라 1부의 마지막 순서부터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가득하여 탁한 냄새가 났다. 자리를 가장자리에 잡고 관람했다. 무대에는 3명의 풍물굿패가 북을 치고 있었고 뒤 쪽에 위치한 스크린에서 ‘4.3트라우마 굿치료’라는 시가 나왔다. 4.3에 관련된 행사에 가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이번에도 그 분위기가 느껴졌다. 고조되었다가 사그라지는 북소리를 들으며 시를 읽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무고하게 희생된 제주도민들이 너무 불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