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화폐전쟁 2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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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후감 화폐전쟁 2를 읽고 나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철학산책 독후감≫
세계를 움직이는 힘, 금권 네트워크
- 쑹훙빙의 화폐전쟁 2를 읽고 나서 -
목 차
Ⅰ. 줄 거 리
1. 역사 속의 국제 은행 가문 네트워크
2. 세계를 조종하는 지배 엘리트 그룹과 배후의 금융 과두
Ⅱ. 느낀 점 및 확장하여 생각하기
Ⅰ. 줄 거 리
1. 역사 속의 유럽 국제은행가문 네트워크
국제 은행 가문들은 과거 수백년간 유럽 각국의 복잡한 국가 내정과 외교, 전쟁과 혁명, 정변과 음모를 배후에서 조종하거나 장악하거나 결정했다. 로스차일드, 블라이흐뢰더, 오펜하임 등 17개 주요 국제 은행 가문들이 사통팔달로 통하면서도 깊숙한 연계를 가지고 있었고 한편으로는 제휴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투구의 격렬한 싸움을 벌이면서 서로 돕거나 경쟁을 벌였다.
특히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이야말로 자금을 확보한 국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는 진리가 증명된 전쟁인데 저자에 따르면 당시 프로이센군이 준비태세 들어가는데 2400만 탈러, 매월 추가적으로 600만 탈러씩 들었다고 한다. 만약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금 지원이 없었다면 프로이센 재정 형편으로는 2개월치 전비도 부담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국제 은행 가문들은 이쪽에서 문제나 분쟁의 해결사를 자처하고 저쪽에서는 문제나 분쟁을 만들어내는 악역을 담당하는 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전쟁을 벌이는 쌍방에게 대리인을 자청해 군수 업체의 상장, 군수 채권 발행, 융자 진행에서부터 전쟁 채권 발행, 전후 배상 채권 인수, 배상자금 이체, 국가 재건을 위한 융자 등의 사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일괄로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커미션을 챙겼다는 것이다. 실제 프로이센과 프랑스 간 전쟁인 보불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 후 프랑스에게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요구했는데 당연히 프랑스 입장에선 거액의 배상금을 낼 도리가 없으므로 채권발행을 통해 지불했다. 이 과정에서 오펜하임 가를 비롯한 국제 은행 가문들은 국채 발행, 유통 등을 통해 수수료로 무려 1%인 5000만 프랑이나 챙겼다고 한다. 전쟁의 결과야 어떻든 전쟁에 나서는 양국의 국제은행가문들은 돈을 벌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회사법이 느슨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제 은행의 발전이 더뎠고 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로스차일드, 베어링, 슈뢰더 등을 비롯한 민영 은행들이 마음껏 영국과 유럽 각국의 채권 발행 등과 관련된 금융 채널을 완전히 장악하고서 세계의 자본과 신용 유동 방향을 농단하는 행보를 이어갔다. 우선 처음 두각을 나타낸 가문은 베어링 가였다. 앞서 언급했듯이 전쟁은 전쟁 당사국 사이에 있는 은행에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준다고 했는데 베어링 가가 당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과 더불어 속칭 유럽의 6대 권력으로 불리게 된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선 영국은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군비 지출이 엄청 늘면서 자연스레 국채 발행 비중을 늘려나갔는데 베어링 가는 이 전쟁 채권들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12년 동안 무려 19만 파운드의 차익을 챙기게 된다. 또 1815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완패하면서 프랑스는 7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되었는데 이 때 베어링 가가 대리인으로 나서면서 반 프랑스 동맹국은 배상금을 손에 넣었고, 프랑스는 외국 군대의 점령에서 벗어났지만 역시 최대의 수혜자는 막대한 수수료를 챙긴 베어링 가였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듯이 정확히 10년 뒤 나폴레옹 전쟁을 기점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에게 주도권을 빼앗기며 베어링 가는 쇠락하게 된다.
프랑스의 경우 산업 혁명이 영국에 비해 두세대나 늦었다. 게다가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과 뒤이어 벌어진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전쟁에 막대한 타격을 안겼다. 그래도 프랑스는 독일이나 미국보다 훨씬 빨리 산업 혁명의 과정에 접어들었고 북미, 인도차이나, 아프리카 등지의 막대한 해외 식민지 자원과 활발한 해외무역으로 성장세가 매우 빨랐다. 물론 프랑스에서도 은행가문들의 영향력은 빼놓을 수 없었다. 크게 프랑스 역사 상 주요 은행 가문은 스위스에서 건너온 미라보, 말레, 호팅거 가를 위시한 청교도 은행 가문들과 로스차일드, 풀드, 스턴, 웜스 가 등으로 이루어진 유대계 은행 가문이었다.
당시 청교도 은행 시스템과 유대계 은행 가문 시스템이 프랑스 정치와 경제의 패권을 놓고 벌인 한판 승부 때문에 프랑스 정치과 경제 시스템은 거의 마비되고 말았다. 1936년 파리 증권 거래소에 상장된 회사의 총수는 1,506개였는데 이중 프랑스 국가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회사가 800개, 그 중 유대계 은행 가문이 400개를 장악하고 있었고 청교도 은행들이 300여개를 통제하고 있었다 한다. 고작 100여 개만이 이들 그룹이나 다른 세력의 통제를 받지 않는 회사들이었던 것이다. 이밖에 당시의 금융가문들은 언론계와 정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은행가들이 직접 언론사를 세우는 일이 빈번했고 나폴레옹 3세 때는 금융계 출신으로써 정계에 진출한 아실 풀드 재무부장관이 있다. 또 1962년 드골 대통령 시절 총리로 임명됐던 퐁피두는 로스차일드 가 산하의 프랑스 은행 총재를 역임하다가 총리에 임명되고 이후 69년부터 74년까지 대통령까지 수행했다. 프랑스에서도 실로 은행가문들의 영향력이란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미국은 엄청나게 풍부한 천연자원, 심각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노동력 부족, 거의 제로 상태인 자본의 세 가지 요소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유럽과는 현저히 다른 금융환경이었고 은행 가문들을 방해하는 봉건 계급제도나 종교 박해 등이 없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19세기 내내 미국에는 국제은행 가문들이 대거 속출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그룹은 역시 유대계 가문이었다. 대표적인 유대계 은행 가문으로는 셀리그먼, 벨몬트, 시프, 쿤, 룁, 바르부르크, 슈파이어, 리먼, 골드만, 삭스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국의 국제 은행 가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국가 분열은 기본이고 혁명, 전쟁까지 일으킬 정도로 무소불위의 능력을 자랑했다. 그 분명한 결과가 파나마의 독립이었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기 위해 운하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고 파나마 운하와 니카라과 운하 두 개 중 고심하던 차에 파나마 운하 공사를 시작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서 파나마 운하 공사에 대한 반대가 형성된다. 그러나 셀리그먼 가는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건설 기술자 부노바리야를 고용해 의원들을 설득하고 파나마운하를 반대하던 콜롬비아를 저지하기 위해 파나마 민족주의자들에게 혁명을 일으킬 수 있도록 600만 달러의 자금을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파나마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파나마를 독립시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