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양식과 분석 - 송환,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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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양식과 분석 - 송환, 2003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큐멘터리 양식과 분석 -
1. 영화의 선택계기
2011년 1월말 비전향장기수의 국가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그 사건은 비전향장기수 21명이 ‘국가가 사상전향제도라는 반인륜적, 반인도적 범죄행위를 저질러 심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며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20억원대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이었고, 결국에는 5년 유효기간인 손해배상청구권의 시효가 소멸되었다는 이유에서 원고의 패소로 끝나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비전향장기수가 어떤 이유로, 얼마나 수감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 기사에 크게 관심을 갖지 못했다. 인권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비전향장기수에 대해 물어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이 영화에 대해 추천을 받았고 그 때 본 이후 기억에 남아 영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사회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좋아한다. 물론 자신의 이야기나 혹은 자연 등을 담은 아주 좋은 영화들도 많지만 그런 것 보다는 영화를 보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게끔 단 한명이라도 그 문제에 대해 바꾸거나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영화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나는 2003년에 개봉한 을 선택하게 되었다.
2. 그리고 비전향장기수
송환은 참여적양식의 형태를 띈 다큐멘터리이다. 감독인 김동원은 인터뷰를 하고 해설을 하며 이야기와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을 선택했고 비전향장기수인 김석형, 조창손과 함께 호흡하고 살며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출소 후 갈 곳이 없던 비전향장기수 조창손과 김석형은 이북출신의 주민 운동가의 집에서 지내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자신이 처리하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립하는 성향을 보이며 마을 사람들 속에서 차차 사회생활에 적응해나갔다. 김석형은 정치공작원 출신으로 북한에서는 고위급 간부였다고 한다. 그는 학식이 풍부하고 계몽적인 성향이 강했다. 이에 반해 조창손은 공작소 출신이고 북한에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 조용하고, 부지런하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으며 지내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감독의 거주지이자 김석형과 조창손이 지냈던 봉천동은 주민운동이 활발한 동네였고, 가난했지만 함께 어울리고자하는 주민들의 의식이 깃든 곳 이었다. 두 사람이 오고 나서 든든한 후원자를 얻은 기분으로 장기수 협의 야유회 등 주민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때 묻지 않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보며 감독은 전향하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그러기엔 힘들었다. 순수한 태도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가도 내부를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단호하게 거부감을 내비쳤다. 당시 감독의 어린 시절에는 뉴스나 반공드라마에서 간첩들이 많이 등장했었고 드라마가 끝나면 아버지께서 공산주의가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설명해주셨고, 따라서 어린 시절 감독은 당연히 간첩에 대한 공포감과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자라면서 국가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간첩사건을 다뤘다는 것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한다.
당시 비전향장기수들은 감옥에서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전향한 사람들이 더러 있기도 했고, 감옥에서 매를 맞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강제적으로 전향한다는 서류에 지장을 찍기도 했다. 비전향장기수들을 미전향 장기수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미전향 장기수는 아직은 전향을 하지 않은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그들을 전향시키겠다는 협박을 함축하고 있다. 1972년 남북적십자 회담 이후 그들은 석방과 송환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고, 박정희는 교도소의 모든 장기수를 없애고자 강제 전향 공작을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구타, 물고문 등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는 고문이 행해졌다. 장기수들은 당시 얘기를 하면서 다들 치유될 수 없는 고통에 말문이 막히곤 했다. 옥중 사망한 비전향 장기수 명단도 여럿 있었다. 현재까지 출소한 7년 이상 복역한 비전향 장기수는 102명으로 집계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신념을 포기할 수 없어서, 또 민족과 민중을 위해서 전향할 수 없다고 했고, 그 안에서도 사상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고 서로를 채찍질했다. 감옥 안에서도 그들은 쉼 없이 활동하고 치열한 사상투쟁을 계속 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전향 공작의 폭력성 그 자체에 자신이 저항해야 했던 정당성과 정의를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간이라는 품성을 지키기 위해 폭력에 맞섰다고 말한다.
주인공인 김석형, 조창손은 남한에서 주차관리요원, 아파트 관리경비원 등의 일을 접하며 자본주의를 배워가며 적응해나갔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원, 천주교 단체 등에서 비전향 장기수들을 위해 후원 회원이 되어주었고 그들은 이념적으로는 장기수들과 거리가 멀었지만 인도주의에 입각해 그러한 활동을 펼쳤다. 감독은 여론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장기수들의 영상을 촬영해서 보내고 북의 영상을 받는 형식을 진행하고자 일본인친구인 이시마루를 매개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이시마루는 북한에의 입국을 거절당했고, 95년부터 북한은 심한 경제적 난관에 부딪혔으며 미국은 더 철저히 북한을 봉쇄했다. 당시 남한은 북한의 이러한 상황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국민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일으켰다. 이러한 보수 언론들의 보도를 믿을 수도 없었지만 당시 장기수들 또한 미국에 대해 상당히 비관적이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없는 북의 상황을 취재하면서 감독의 일본인친구인 이시마루는 북에 대한 태도가 변했고. 북한의 심각한 인권사회. 빈부격차, 북한과 미국의 문제인 한반도에 대해 관심을 가져나갔다. 1995년 장기수 석방 운동이 해외까지 알려져 그곳에서 석방에 대한 압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송환 운동이 점차 해외에도 이슈가 되자 국민들은 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표명했다. 맞교환 형식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일반적인 북송에 대해서 논란이 일어난 것이다. 1999년 말 송환 추진위원회 결성되었고, 희망하는 모든 송환 장기수들이 대상이었다. 인도주의에 입각한 무조건적인 송환을 정부에 알렸다. 일반 국민들의 호응은 예상외로 뜨거웠지만 무조건적인 송환에 반대하는 여론도 많았다. 송환을 희망하는 장기수들의 파악이 우선되었는데, 남쪽 북쪽 모두에 가족이 있는 장기수들의 심적 갈등이 심했다. 2000년 이후 비전향장기수들에게 송환은 현실이 되었고, 당시 북에 대한 인식이 많이 개선되었고,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기대심리 또한 상승했다. 그들은 끝내 북송 될 수 있었고 최종목표는 통일이라 하였다.
3. 의 양식 - 참여영화 / 내가 생각한 참여영화
참여적 양식, 참여영화의 근원은 시네마베리테에 있다. 시네마베리테란 눈에 잘 띄지 않는 장비를 사용하여 직접성과 자발성, 확실성을 얻어내고 미리 예상된 서사 라인이나 소재 개념을 거부하는 일련의 기록 영화고, 관찰영화에서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대안적인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시네마 베리테는 모든 자연스러운 영화를 포함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참여영화라고 부른다. 이런 경향의 영화들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카메라의 앞에서든 뒤에서든 중요한 참여를 끌어냄으로써 진실에 이르고자 하며 참여영화의 개념은 프랑스 민족지 학자인 장 루슈 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원주민의 삶을 기록하던 중 촬영 자체가 참여자와 카메라에서 벗어난 사람 사이에 중요한 관계를 촉발한다는 사실을 발견 했고,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는 유일하고 솔직한 방법은 촬영 과정 자체를 카메라 앞에서 공유하는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참여영화 방식을 채용하여 많은 다큐멘터리들이 제작되고 있고 역시 그 속에 들어간다. 처음부터 조창손, 김형석씨가 감독에게 경계를 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김동원 감독 이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을 것이고 그들 또한 카메라를 들고 찾아온 사람들을 잘 알 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카메라에 마음을 열었고 진실 된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을 허락했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선택한 참여양식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과 함께 호흡한 감독이 대단하다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