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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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평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기독교와 신도국가주의의 대결
1. 서론
복음의 유입에는 항상 반대세력의 저항이 존재한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복음이 뿌리내리는 것을 막으려는 핍박이 존재하는데, 우리나라도 물론 예외는 아니었다. 구출라프 목사의 방문 이후로, 조선에는 끊임없이 기독교가 노출되었고, 복음의 뿌리를 끊어내기 위한 시도가 있어왔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일본의 통치를 받던 시절, 천황을 섬기라 했던 일본 신도에 의한 핍박이 가장 치열했고 두려웠다.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것에 굴복했고,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죽음을 각오하며 우상숭배에 맞서 싸웠다. 그들의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일본의 군사주의를 이해해야 하며, 또한 군사주의와 융합된 일본의 종교인 신도를 이해해야 한다. 신도를 이해할 때, 신채참배가 우상숭배임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우리 믿음의 조상들을 영적 싸움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2. 요약
1) 일본의 고대, 중세, 근대의 신도
이 책은 일본민족의 기원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저자는 일본의 종족은 주로 대륙에 기원했고, 일본 천황가문인 텐손 족은 부족연합의 성격을 띄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은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문화와 종교가 유입되면서, 중국문화권에 속하게 되었다. 일본의 고대 사회는 고대 신도를 믿었다. 이것은 원시부족이나 씨족의 종교로부터 발전했는데 고대신도에는 일반적으로 세 그룹이 존재하고 있다. 태고신들, 자연신들, 인간신들이다. 가장 높은 신은 하늘의 주인인 아메노미나카누시-노-카미이며, 일본이라는 국가의 탄생에 있어 큰 역할을 맡고 있지 않고, 태고신에 속한 이자나기와 이자나미가 일본뿐 아니라, 태양과 달과 폭풍등의 자연신들까지 만들었다. 고대 일본인들은 신앙은 이 세상 뒤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었다. 모든 신적인 존재들은 이 세상 뒤의 숨겨진 세상에서 비롯 되었고 또한 고대신도에는 4종류의 혼과 영에 대한 신앙이 존재했다. 니기미타마, 아라미타마, 쿠시미타마, 사키미타마이다. 그리고 혼은 빛, 불, 그림자, 거울, 검, 바람, 연기, 회색빛 구름 같은 물체의 형태를 띈다고 믿었으며 죽은 자들은 하나의 의식의 형태를 띈다고 믿었다. 사후세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들이 이자나미-노-미코토가 수호신으로 군림하는 요모-추-쿠니에 이른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자나미-노-미코토는 요모-추-쿠니를 방문한 후에 자신의 몸을 정화시키는데 이것은 고대신도의 중요한 예식인 된다. 고대 일본인들에게 죽음은 불결하고 오염된 것이었다. 신도에서 죄 개념은 도덕족 측면보다는 육체적 측면에 치우쳐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들과 사람사이의 교통을 의미하는데, 고대 신도에는 신들과 인간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이 없다. 무희들은 미코로 불린다. 강신을 요구하는 노로이와 탄원의 형태를 지닌 이노리의 기도가 존재하는데, 고대신도엥는 종교적인 신앙을 통한 위로와 위안 같은 것은 없다. 신도에는 신들의 필요보다는 인간의 필요로 인해 제사를 드린다. 고대신도에는 미소기-바라에라는 정화의식이 있다. 고대신도의 사고구조는 이 세상을 가장 중요한 존재로 여김과 또한 그 세상은 인간이 즐거움을 누리는 장소라는 견해가 있다. 고대신도에는 분명 미래의 세상이 존재하지만, 현실의 세상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A.D 4세기 무렵, 텐노씨족가문의 영도 아래서 야마토에 한 국가가 수립되었다. 종교의식인 야마토 제례의식은 태양숭배로 통일되었다. 새로 세워진 왕조는 태양여신으로부터 자신들의 핏줄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여기는 천손의식으로부터 천왕가문의 계승라인을 정착시키는데 있었다. 이자나기와 이자나미에 의해 일본 땅이 만들어졌고 이 한쌍의 신들은 이 땅에서 창조사역을 시작했다. 불의 신이 태어나게 되면서 이 신들은 요모-추-쿠니로 물러나고 아마테라수-오미카미, 추키요미-노-미코토, 수사노와오-노-미코토의 세개의 카미를 만들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아마테라수의 손자인 니니기-노-미코토가 일본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의 장손인 짐무텐노가 일본의 초대 천황이 되었다. 고대신도는 대부분 자연숭배로 형성되었고, 일본에 불교와 유교가 유입되면서 고대신도와 혼합되었다. 메이지 유신이후에는 일본신도가 일본민족주의와 강력하게 결합되었다. 신도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서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불교의 색채를 강하게 입었다. 쇼토쿠 타이시 태자의 영향으로 한국을 통해 전달된 불교가 일본에 급속도로 전달되었다. 불교가 수입되면서 처음에는 신도와 나란히 그행보를 움직여 나갔지만, 마침내는 불교가 신도보다 더 우세한 종교가 되었다. 혼지 슈이자쿠 개념이 당시에 힘을 얻으면서, 일본에서 불교의 힘은 갈수록 커졌다. 부처와 보살이 일본에서는 카미로 둔갑하여 나타났다는 의미인데, 혼합주의르르 지향하는 개방적인 신도 진보진영과 저항하여 불교와의 혼합을 거부하는 배타주의적 신도 보수 진영의 싸움이 생겼다. 그리고 신도측에서는 신도교리에서 불교적인 색채가 들어 있는 사상을 저거하기 위해 작성한 신토-고부쇼가 제시되었다. 하지만, 당시의 보수적인 신도들이 아무리 불교를 반대했다고 하더라도 자시느이 교리이론을 불교적인 요소와 색채를 가미하기를 포가할 수 없었던 이유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부터 수입된 고등종교의인 불교의 차원 높은 사상때문었다. 근대 초기의 신도는 유교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토쿠가와시대에 들어와서 유교는 국가의 비호를 받아 장려되었고, 결국 막부의 공식적인 통치철학이 되었다. 그리고 유교를 숭상하던 자들은 유교신도를 설립하려고 노력했다. 유교의 슈시학파, 왕양명학파, 경전학파의 여러 인물들이 신도에 유교를 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또한 불교가 유입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외부종교로부터 신도의 순수성을 지켜려는 운동이 일어났다. 요시카와 코레타와 데구치 노부요시 같은 인물들은 신조주의의 견해를 밝히기 위해 노력했다. 요시카와 코레타는 신도를 최초의 종교라고 설명했고, 일본을 카미의 길이 계시되어 설립된 국가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불교를 거부했다. 메이지 유신기 직전에는 신도부흥기가 일어났다. 일본 고전문학의 대가인 케이추는 ‘고대로의 복귀’를 제창했다. 케이추 이후에 카다 하루마츠, 카모마부치, 모토오리 노리나가, 히라타 아추타네등이 대표적인 일본민족학자들이다. 이들은 일본의 민족정신을 각성시켰고, 고전 신도운동이 만개하도록 만들었다. 이 중에서도 히라타는 가톨릭의 서양교리를 받아들여서 신도이론을 확대하는 데 사용하였다. 그는 신도에 의해 전 세계의 중심지인 일본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국가체계는 다른 모든 나라의 그것보다 더 훌륭하고 일본 제국은 만국의 근본이며 학문의 토대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모든 주장들의 최종 목적은 바로 손노 아이코쿠에 있었음을 직시해야 한다. 그는 천황을 국부로 여겼고 그가 생각한 효도란 바로 천황에 대한 효도를 의미했다. 그리고 히라타의 주장은 그의 제자들에 의해 히라타 신토로 발전되어졌고 이들의 사상은 메이지 정부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했고, 메이지 신토의 발전에 있어서 핵심적인 선도적 견인차 노릇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메이지 정부는 신도를 국교로 채택했다. 국가 권력의 중앙 집권화와 외세에 대항하는 국가적 방어력의 증진을 목표로 신도와 천황숭배와 부시도의 합성물인 국수적 민족주의가 조장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이었다. 천황제도의 부활인 동시에 일본이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는 상징적이며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토쿠가와 막부의 첫 통치자였던 토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수립되었다. 막부 정권은 외국의 이질적인 사상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지닌 일본의 봉건 영주들에 대한 서양 군사력의 도움을 경원시했다. 정부 조직은 매우 억압적이었고, 본질적으로 발전과는 반대방향으로 나아갔는데, 그 이유는 발전과 진보로 인해 국가에 대한 불평불반과 전복타도가 획책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도쿠가와 막부정권의 몰락은 정치,경제, 지식적 요인등에 의해 비롯되었다. 문호개방에 반대하던 천황이 죽고 메이지 천황으로 알려진 무추히토가 천황자를 승계한다. 이 새 천황은 막부정권을 반대해오던 자들에게 그들의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필연적인 기회를 제공해 주었고, 결국 막부정권은 종말을 맞았다. 천황일파의 승리는 또한 신도부흥운동의 승리이기도 했다. 초기의 메이지 정부는 히라타 신토의 원리를 따라 국민들이 받아드려야 할 종교와 도덕교육을 통일 시키기 위해 신도를 하나의 종교로 수립하려고 했다. 다이-쿄인과 추-쿄인, 쇼-쿄인을 건립하고 국민을 교육시켰다. 하지만, 이때에는 불교승려들의 완고하고도 집요한 반대, 일반대중의 여론 때문에 성공하지는 못했다. 메이지 정부는 일본 헌법과 천황의 교육칙서를 통해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인 자유가 헌법에 의해 보장되었으나, 실제로는 모든 종교인들이 천황의 지위와 신성함이 인정되었어야 했다. 보편적인 정부의 정책은 천황과 그를 받드는 측근들의 절대적이 권위에 복종하도록 방향이 맞추어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 천황은 그 이전의 일본 역사상 그 어떤 지배자도 가져본 적이 없는 막강한 지위를 부여받도록 조장되었다. 소위 국민도덕을 양성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학교에서 천황교육조직이 낭독 되었다. 국민의식은 어린 학생들의 마음속에 신동의 절대적이고 전능한 속성개념과 그에 대한 인간의 철저한 복종심을 심어주는 기능을 했다. 천황주의는 천황이 태양 여신의 살아있는 화신이며 그와 동시에 절대자인 신의 현현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천황은 신성불가침의 존재이며, 천황의 주권은 제국의 권위에 대한절대적인 무오와 불후의 상징이었다. 일본의 국수적 민족주의는 천황숭배와 부시도가 특별하게 결합한 이데올로기였다. 부시도는 군국주의자들에 의해 ‘일본 정신의 본질’로 칭해졌다. 육군성대신의 지위는 현역에 복무하는 장성만으로 제한되었고 군 감찰관은 내각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 전국은 정부산하에 있기보다는 완전히 군국주의자들의 통제속으로 들어가 있게 되었다. 참모진영은 독립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고 또한 정부의 승인없이 군사 행동을 취할 수가 있었는데, 19세기 후반에는 이러한 방법으로 군국주의자들이 이미 국가를 통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군국주의자들은 군대를 확대하면서 국수적 민족주의 신도 이데올로기를 사용하였다 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