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개론]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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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탈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1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출처, 헤세 데미안 中) 나는 이 책을 이 말로 정리하고 싶다. 왜 이 말로 정리하고 싶은지에 대한 이유는 결론에서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 우선 이 책을 읽고 느낀 현실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우리(나)가 배우는 학문 대부분은 서양에서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근대가 시작되면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지금 현재까지 자리 잡아 오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는 그렇게 들어온 서양의 이론들을 초, 중, 고 과정을 걸쳐 뇌에 쌓아둔다. (쌓아둔다 함은 입시 위주의 교육 즉 주입식 교육을 통해 아무 의문이나 생각 없이 뇌에 저장함을 말한다.) 지나친 입시전쟁으로 우리(나)는 배움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다. 이론을 삶의 접목시키지 위한 배움이라기 보단 우리의 교육은 그저 누가 더 신속하게 문제에 맞는 답을 정확하게 찾는지, 누가 더 많이 외우고 있는지 알고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게임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 잡아온 우리나라 주입식 교육시스템 덕분에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망각해 왔다. 즉 항상 문제에 대한 답이 교과서나 텍스트에 나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생각함에 있어도 항상 정답을 찾으려 하고 그리고 그로 인한 새로운 사고에 대한 두려움, 다름이 아닌 틀림에 대한 두려움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결국 그렇게 쌓아둔 지식들을 통해 생산된 수많은 의견들 그리고 그 중 다수가 지지하는 쪽으로 우리는 우리(나)의 생각을 내면화 시킨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있다. 다른 사람, 다수의 생각을 주견으로 일삼고 있는 우리(나), 그저 표상적인 뜻만 알고 있는 채 혹은 배웠던 개념들이 감응적 개념에 머무른 채 자신의 생각하나 자신의 언어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 - 배운 지식을 써먹지 못하고 앎과 삶이 괴리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 앞으로21세기를 이끌어갈 리더 혹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당당히 자신 있게 말 한마디 못하는 우리는 마치 심 없는 팽이처럼 주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맴맴 돌고만 있다. 나만 해도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내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말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 아닌 그 생각하는 자체부터가 힘이 든다. 그 이유는 ‘내 생각이 잘못되지는 않을까?’에서 오는 두려움 무엇보다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정말 입시, 주입식 교육에 폐허였다. 그저 외우라는 것 외우고 하라는 것 하기만 했다. 왜 그렇게 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모르면 그냥 닥치는 대로 외우기 바빴다. 빨리 고 3이 지나가길 바라면서 말이다. 이런 내가 무슨 수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배웠겠는가? 누군가 자신의 의견을 당당히 피력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하고 감탄만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정말 수많은 독후감을 써 왔는데 지금까지도 달라진 것이 없다. 책을 이해한다고 하긴 보단 보기에 바빴다. 즉 줄거리 파악하기에 바빴다. 그리고 과제할 시간은 한정 되어있고 정보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조혜정작가님이 언급했듯이 이인성의 ‘당신에 대해서’라는 책과 같이 원래 알고 있던 형식에 벗어난 책이나 핵심(답을) 찾기 힘든 책은 될 수 있도록 피했다. 또한 ‘작가와 소통을 통해 책을 음미해야한다’라는 이론적 지식은 알고 있지만 책을 읽고 내 느낀 것 생각하는 것을 쓰기보다는 인터넷 검색 창에 ‘000독후감‘을 치면 사람들의 느낀 점이 주루룩 나오는데 그 사람들의 생각을 참조하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그것을 내 자신에게 내면화 시키며 ‘그래, 저렇게 생각하면 되는 거구나! 음 내가 말 하려고 했던 게 저거 였어 그래!?’ 그러면서 조금 말을 바꿔가면서 온전한 나의 글인 것처럼 쓰는 것이 일쑤였다. 물론 다 베껴 쓰는 것은 아니다. 핵심을 파악하고 나의 경험을 조금씩 곁들어가며 요리를 했다. 이번 과제도 솔직히 물론 내 경험이 들어가고는 있지만 ‘다른 사람의 생각이 투영되지 않았다.’라고는 말할 수 없다. 분명 읽다 보면 어디서 봤던 이야기 같고 그럴 것이다. 그리고 어디 이뿐만 이겠는가? 고등학교 2학년 때 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라는 사회문제를 토론하는 동아리 단장으로 활동했었는데 모든 동아리활동이 끝난 상황에서 동아리 선생님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찾아뵈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던 동아리 마무리 활동지 내용을 구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었다. 당연히 아무런 준비가 안되 있었던 나로서는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문제는 무슨 내용으로 구성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애꿎은 컴퓨터만 찾아보다가 동아리 선생님께 혼난 적이 있다. 여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나는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 미숙했다. 게다가 대학교 들어와서 우연찮게 성경동아리에 들게 되어 매주 수요일마다 성경을 배우고 목요일에는 독서토론을 했는데 문제는 그 시간 혹은 그 시간이 끝날 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후회와 좌절뿐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불교신자로서 성경을 배우는데 솔직히 거부감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며 그래도 세계적으로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로 누구나 한번쯤 살아가다 보면 한번 읽게 될 것이며 여러 종교를 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마음 크게 먹고 수업을 듣기로 결정했는데 멘토 선배님께서 자꾸 ‘하느님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라는 등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시는데 그때마다 매번 말문이 막혀 그때마다 당당히 답을 할 수 없는 내 모습에 화가 나고 한 없이 작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는 것이라도 조금 말해 볼 걸… 틀려도 말이라도 해 볼 걸… 질문만 하면 미적지근한 웃음을 지으며 한 손으로 머리를 긁기도 하고 다음으로 단계 혹은 과정으로 넘어가기 바라는 눈빛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기도 하고 가끔은 눈길을 피하기 바빴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행동은 습관처럼 독서토론 할 때도 가끔 무의식적으로 행해졌다. 처음 독서토론 하러 갔을 때 정말 꿀 먹은 벙어리였다. 진짜 내가 생각하기에도 ‘짜이는 무사 여기 와신고’ 할 정 도로 내 생각을 자유롭게 피력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말 하면서 중간의 자신의 사고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수정하기도 하는데… 그래도 두세 번 나가다 보니깐 점차 무슨 말이라도 하자 하면서 조금씩 말을 해나가고 있지만 너무나 상투적이 이야기들뿐이었다. 정말 인터넷이나 책에서 했을 법한 이야기들. 예를 들자면 ‘진정한 행복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에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기가 하고 싶고 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이라고 답하며 ‘사유재산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현재 사회가 발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유재산의 존재 즉 자신의 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만약 사유재산 없이 누구나 똑같이 일하고 필요한 만큼 분배 받는 다면 어차피 필요한 만큼 분배 받을 텐데 굳이 열심히 일한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사회 발전이 이루어 지지 않고 점점 쇠퇴할 것 같다. 그렇기에 사유재산이 필요하다’라는 등에 의견으로 내놓기 일쑤였다. 즉 나는 내가 배운 것을 활용해 나의 언어로 나의 생각을 말하는 탈식민지 지식인과는 거리가 멀다. 나는 여전히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체 또 내가 배운 이론을 내 삶의 접목시키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타당한 답을 찾기 위해 인터넷에 떠도는 정처 모를 생각들을 긍정, 부정 그 두 부류로 나눈 뒤 각각에서 주장하는 의견을 정리하는데 애쓰며 그것을 내 의견인 것처럼 내 머리 속에 내면화 시켰다. - 그렇게 만들어진 의견을 내가 아는 이론을 삽입하거나 말로 바꿔서 내 의견인 듯 - 이렇게 나의 앎과 나의 삶이 점점 괴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네 자신을 알라고 했다. 나(우리)는 너무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서 여러 가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무지를 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잘 알지도 아니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하고 그러나 결국 자세히 보면 알맹이는 없고 지식과 삶이 겉돌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 가고 있음 이 책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면서 주제적 책 읽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식과 삶이 헛돌지 않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다시 쟁점으로 들어가 보자.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내가 왜 이 말을 처음으로 꺼냈을까?’에 대한 답을 내려고 한다. 나는 새는 나(우리)의 생각으로 정의하고 그리고 세계(알)는 입시 위주의 주입식 교육으로 인해 생겨난 수중축대 - 자기의 뚜렷한 주관이 없이 여러 사람의 틈에 끼어 덩달아 행동함을 이르는 말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하는 사회로 정의하려 한다. 즉 이 책은 우리에게 우리(나)의 생각이 나오기 위해서는 입시 위주에 주입식 교육의 체제에 벗어나야만 함을 시사해준 책이라 생각한다. 즉 ‘그것이 틀리네, 맞네.’라는 식의 답을 찾는 습관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자유로운 사고를 얽매고 있던 다름이 아닌 틀림에 대한 두려움과 새로운 사고 전환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자신이 배운 것을 최대로 동원해 자신만의 언어를 가지고 자신만의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에 한정해서는 진정한 탈식민지 지식인이 될 수 없다. 생각에서 멈추지 않고 그 생각이 삶과 연결되어야 만이 비로소 탈식민지의 지식인의 완성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이 책에서 선배들이 쓴 일부 글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문성과 논리성이 내가 내 생각을 하고 표현하는데 위압감을 주면서 나를 완벽히 식민지 지식인에서 벗어나도록 하지 못했지만 내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볼 기회가 제공해 주었고 무엇보다 보편주의 본질주의 즉 ‘틀렸다’라는 두려움에 벗어나 새로운 사고를 해볼 여지를 마련해 줬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싶다. 그리고 끝으로 앞으로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사회학과에 다니는 한 학도로서 세상과 책들과의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언젠가는one’s thinking의 두려움을 갖는 식민지 지식인의 옷을 벗고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앎이 삶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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