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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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 서평 >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은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에서 태어났다. 훌륭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라틴 고전문학과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에서 문법과 수학교사로 두각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마니교 빠지기도 했고 회의주의, 신플라톤주의의 신비주의 거쳐 기독교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히포의 주교로 있으면서 기독교 신학을 정립했다. 그리고 고백론은 (A.D. 397~401) 집필한 책이다.
어거스틴은 먼저 자기인생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으로 고백론을 시작하고 있다. “우리 주는 위대하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도다.”(시147:5) 인간은 죄가 많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할 수 없는 미천한 죄인임에도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의 찬양을 받고 싶어 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이 위대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임을 고백한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누구인가? 의 질문에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시18:31)의 말씀으로 하나님은 가장 높으시고, 선하시고, 자비롭고 의로우시며 완벽하시고 변하지 않는 분임을 말하면서 그 하나님 안에 안식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그분의 능력과 지혜를 잘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사실대로 말하면 인정하지 못하고 잘 믿지 못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와 문제를 해결 하실 수 있는 선하시고 자비로운 분임에도 우리는 다른 곳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다른 것은 없다. 하나님 안에 거할 때 문제의 해결과 삶의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나도 내 삶의 첫 고백을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나의 유일한 구원자 되시는 분은 하나님 한분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싶다.
유아시절 어거스틴은 자신이 어디로부터 와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지만 육신의 부모를 통하여 왔고 자랐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여 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할 때 숨지 마소서”(시55:1) 사람이 탄식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젖 먹이 아이라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아이가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눈물을 이용하고 화를 내고 한다. 하나님은 젖 먹이 아이의 몸에 감각과 본능을 주셨다. 그래서 감사하고 찬양 하라고 명령 하신다. 그리고 부모를 통하여 글을 배우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을 배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유아시절 공부를 게을리 하고, 놀기 위해 부모의 말을 소홀히 여기고, 억지로 공부했다. 이 시기에 공부하기를 싫어했고 또한 강제로 공부시키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다만 부끄러운 영광과 재물에 대한 끝없는 욕심을 만족 하기위한 목적뿐 이였다.
어거스틴은 유익한 공부보다 헛된 것을 더 좋아 했다. 라틴어와 헬라어 공부를 통해 강요함보다 자유로운 호기심이 더 큰 효과를 가져 온다는 것을 알았다. 배움을 통해 어거스틴은 주님을 섬기는 일에 사용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언어의 배움을 통하여 거짓말과 남을 속이는 죄를 고백한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기억력, 말솜씨 등을 주심에 감사하며 찬양한다.
우리는 유아시절의 잘못에 대해 자신의 잘못 이라기보다는 부모 또는 형제들에게 그 잘 못을 돌린다. 부모가 어릴 적에 바로 교육하지 못했고, 형과 누나가 모범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배움에 있어서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의 호기심보다 부모들의 강요함이 더 많은 현실 속에 우리는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배움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보다 원망이 더 많았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유아시절을 회고 하면서 자기인생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 또한 어린 시절 더 좋은 환경과 배움을 못한 것에 원망하기보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하심과 은혜를 감사하고 싶다.
어거스틴이 16살 되던 청년시절 세상적 만족과 허망한 사랑을 추구하며, 육체의 정욕과 사춘기의 열정적 상상력이 안개같이 일어나 마음을 흐리고, 어둡게 하였기 때문에 무엇이 순수한 사랑이고 추잡한 정욕인지 분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희망은 내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출세에 필요한 공부를 하는 것이 였다. 배를 도둑질한 것에 배고파서, 궁핍해서도 아니라, 다만 착한 일을 무시하고,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 이였다. 악한 일을 할 때 악 한 일을 하도록 자극한 동기가 악한 의지이다. 그 도둑질에는 정의나 지혜, 정신이나 기억, 감각이나 활력 있는 생명에 있는 아름다움이 없다. 악인들에게 해를 주는 적은 바로 자기 자신들이 지은 행동이다. 인간은 자기의 욕심이 좋아하는 것을 잃어버릴 때 그것을 다시 찾으려고 갈망한다. 어거스틴이 도둑질을 하게 된 이유는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사귐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나를 기분 좋게 해준 것은 내가 훔친 물건이 아니라 훔치는 행동 그 자체였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는 주님으로부터 떨어졌고, 나의 참된 의지여, 나는 젊은 시절에 주님으로부터 멀리 방황하고, 나 스스로에게 불모지가 되었다라고 고백한다.’(p.68) 나는 어거스틴의 이러한 생각에 공감을 한다. 도둑질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할 때 보통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악한 행동을 한 사람들은 생각을 하기보단 그 일의 행동을 즐긴다. 즉, 자기 자신의 만족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은 잔인한 오락물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특히 젊은 사람들이 가상과 현실의 상황을 구분하지 못하고 가상속의 그 기분을 느끼기 위해 잔인한 일들을 한다. 나의 10대 시절은 생각해 보았다. 혼자 하는 행동보단 친구들과 어울려 좋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함께 어울려 있다는 그 자체가 좋았던 기억이다. 어거스틴은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시절 육신의 정욕, 연극을 좋아하며, 수사학 분야에 대한 자신의 명예를 자랑하는 교만함에 빠졌다. 그리고 키케로의 책을 읽고 지혜에 대한 강렬한 열정을 불타올라 성경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에 속아 마니교에 빠지고 만다. 이러한 모습을 보던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을 위해 눈물로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꿈을 꾼다. 어머니는 주교를 찾아가 자기 아들을 찾아가 이야기를 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때 주교는 이런 말로 권면했다. “나를 떠나시오. 그대가 살아있는 한, 이렇게 흘리는 눈물의 자식은 망할 리 없습니다.”(p.89)
여전히 어거스틴은 마니교에 빠져있었고, 어느 한 여인과 동거 중에 점성가를 찾으며 지내 던 중 친구의 죽음 앞에 인간의 나약함을 인식한다. 친구를 잃은 슬픔에 카르타고로 돌아간 어거스틴은 친구들의 우정을 통하여 위로를 얻는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자들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솟구치는 이러저런 우정의 표들은 우리의 영혼을 함께 녹이는 많은 연료였으며,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나이다.’(p.99) 인간은 교만하기도 하지만 참 나약한 존재인 것 같다. 어거스틴은 생애 처음 인생의 연약함과 비참함을 느꼈다. 그 이유는 사라질 것을 사랑 했는데...그것을 잃고서 인간의 상태를 비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친구를 빼앗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잠시 있다가 살아질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한다. 이 세상의 것에 마음을 두지 말자. 그리고 소유하지 말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기 위해 힘겹게 살아간다.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한 본향인 천국이 있다. 천국에 소망을 두며 살아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