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의 사설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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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유의 사설을 읽고”
한유의 사설을 읽자 맨 처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부처의 이야기였다. 작가인 한유가 그렇게도 배격하였던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그는 날 때부터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말했을 만큼, 남보다 배는 뛰어난 성인이었다. 남다른 출생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역량을 다방면에서 발휘했던 그에게 부친인 정반왕은 당시 가장 뛰어난 스승들을 붙여주었다. 그 스승들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석가 왕자에게 자기가 가르치는 과목의 근본을 묻는 질문을 받았다. 스승들은 대답할 수 없었고, 이에 눈물을 흘리며 떠나려고 하자 어린 석가모니가 자신이 배우는 것은 비단 스승의 지식뿐만이 아니라며 만류해 계속 가르침을 받았다는 고사였다. 이 일화가 떠오른 것은 한유의 사설에서도 석가의 태도와 같을 것을 본받길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유 역시 성인이 자기 능력의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계속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했다는 예로써, 배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배울 것을 권유하고 있다. 배움의 바탕에는 ‘겸손’이라는 미덕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자신에게 이로움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독자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다.부디 독자만이라도 ‘미혹(迷惑)’에서 벗어나도록……. 사대부와 뭇사람들의 배우기 싫어하는 모습을 일일이 열거하고 선례와 비교하는 문장을 보면서 나는 어쩐지 진심으로 후학을 아끼는 스승의 간절한 충고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글은 오늘날을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사실 문장 자체는 고문 운동의 실천가답게 매우 간결하고 훈계하는 식이라서 재미있는 편이 아니지만, 그 간결하고 짧은 문장 속에 가르치고 배우는 것에 대하여 근본적이면서도 다양한 방면에 걸친 교훈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면서 배우고 가르치는 입장에 서게 된다. 꼭 학교만이 아니라 집, 직장 등 삶의 터전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멀티형 인간을 요구하는 경쟁시대인 21세기에 개인은 보다 더 많은 능력을 가지도록 요구받고 있다. 사회에 나가 일을 하면서도 기술, 예술 등을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생 교육’이라는 말이 어색치 않은 이 때에, ‘교육(敎育)’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과연 어떤 배움과 가르침이 바람직한가는 이전부터 끊임없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일본의 교육 동화(아동 소설)인 『창가의 토토』가 몇 년 전 크게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배움과 가르침에 대해서 얼마나 근원적이고 진지한 고민을 우리는 하고 있나? 학교만 예를 들어 보더라도 대부분은 그냥 그것을 삶의 한 과정이자 수단적인 요소로 치부해버리고 끝나는 것 같다. ‘스승은 도를 전하고 의혹을 풀며’,‘제자는 스승을 좇는’ 이 단순하지만 깊이 있는 진리를, 나도 그렇지만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손쉽게 까먹고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그 순간 왠지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 외에 또 한유의 사설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그 다양한 관점 속에 교육의 대상이 아이들뿐만이 아니라는, 당연하지만 잊혀지기 쉬운 전제가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개개인에게 있어서 배움과 가르침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반복적인 과정인데, 특히 배움에 대해서는 나이가 들수록 그 중요성을 잊고 ‘자식에게는 좋은 스승을 찾아주려고’ 하면서 본인의 문제는 잊어버린다. 누가 자신의 지식과 인품을 완벽하다 하겠는가? 한유의 말마따나 도를 배우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겉치레를 중요시하지 않는 소탈하면서도 트인 마음과 겸손이지만, 내 생각에는 글 초반부에 아프도록 지적하고 있는 ‘본인에게 배움이 필수적(必需的)’이라는 자각이 그 기초가 아닐까 싶다. 나이로는 성년인 내게 이렇듯 번번이 현재의 나의 배움, 그리고 배우는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보게 하는 부분이 많아서 이 글이 인상 깊었다. 글을 몇 번이고 읽고 나서 덮으니, 엄숙한 스승에게서 한 바탕 엄한 목소리로 가르침을 듣고 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어쩐지 오히려 즐거웠다. 잃어버린 중요한 생각의 한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韓愈는 師說에서 사람은 누구나 의혹을 가지고 있으며 이 의혹을 풀기 위해서는 道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스승은 바로 이 道를 전수해 주는 존재로, 나보다 먼저 道를 들은 자가 있으면 그가 나이가 어린 사람이든, 천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에게 배움을 얻으라 하였다. 즉, 韓愈가 주장하는 스승의 개념은 道를 전수해주는 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스승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현대사회에서의 스승이란, 이론적인 지식이나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는 자라고 흔히들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스승이라는 개념을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그러한 배움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론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실용적인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배움을 추구할 뿐, 道를 이해하기 위해서 배움을 추구하는 경우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선 찾아보기 힘들다. 한마디로 현대에서 통용되는 스승이라는 개념은 韓愈가 주장하는 스승의 개념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부르는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를 보자. 이 노래는 스승은 하늘같은 은혜를 베풀어주는 사람이고, 참되고 바르게 살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으로 마치 부모와도 같은 존재라는 내용의 가사를 담고 있다. 이 노래에서 말하는 스승의 개념은 어딘가 韓愈가 말하는 道를 전수해 주는 존재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노래 속에서 스승은 인간으로써 바른길을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로 표현되고 있을 뿐, 능력을 높게 이끌어주거나, 방대한 지식을 전수해 주는 존재라고 표현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노래가 21C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 사이에서 흔히 불리고 있다는 것은, 분명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스승의 모습이 이 노래 안에 내포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스승의 개념과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스승의 개념이 다르다는 점은 참으로 모순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한 인간을 평가하는 기준은 道를 깨우친 정도가 아닌, 개인이 가진 능력의 높고 낮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현 사회에서 혼자만 道를 주장하며 그것을 전수하려는 스승이 나타난다면, 그를 따르는 제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노래로는 이렇게 진실한 스승의 표현할지언정, 실제로는 그런 스승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능력향상의 방법을 전수해주는 스승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韓愈의 師說 중에 ‘句讀만을 익히는 것은 道를 전하는 것이 아니니 의혹을 풀어줄 수 없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이론적인 지식만을 전수하는 자는 진정한 스승이 아니며 道가 부재한 교육은 진정한 교육이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이론적인 지식이나 기술습득에만 연연하는 현대인들은 주변에서 작은 道의 모습을 쉽게 보고 배울 수 있음에도 그것을 진정한 배움으로 추구하지 않게 되어버렸다. 가난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나눌 줄 아는 빈민들, 어리지만 순수한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들, 비록 늙고 추해졌으나 인생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노인들... 우리가 하찮게 여기고 절대 스승으로 섬기려고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서 진정한 배움을 얻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단지 표면적인 배움에만 집착하며 겉으로 드러나는 얕은 지식만을 숭상하는 현대인들. 기본적인 인격을 갖추고 있지 않아도 겉보기에 능력이 뛰어나다면 그를 높이 평가하는 현대인들. 이렇게 표면적인 지식과 능력만을 숭상하여 완성된 사람을 진정한 聖人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그런 지식으로 인해 자만에 빠져 진정한 道를 탐구하지 못하면 愚人으로 빠져들기에 더욱 쉽다는 것을 알고 있는 현대인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과연 진정한 배움과 진정한 스승이란 무엇인가? 韓愈의 師說을 읽고,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으며, 이를 통해 스스로의 모습을 반성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