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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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조작인가
철학에서는 인간이 하나님께서 계시를 통하여 주신 지혜를 붙잡지 않고 자신의 지혜를 의존한다. 자신이 신자라고 생각한 철학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철학은 근본적으로 계시가 주는 생각, 즉 창조주가 피조물보다 앞선다는 기본 전제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철학은 본질적으로 무신론적일 뿐만 아니라 반신론적이다. 전능하신 분, 즉 하나님을 그들의 사고 속에서 제거하려는 철학의 기본 전제로 성경비평도 그대로 영향을 받는다. 신학이 철학에게 성경의 기초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지 않고 오히려 철학의 성경비평을 약간만 수정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신학은 철학이 오늘날 세속 사회에서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성경비평을 그대로 물려받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신학에서 사용하는 성경비평은 역사비평 방법이다. 그는 자신을 과학이라고 자칭한다. 역사비평 방법은 그의 결과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로부터도 과학으로서 인정된다. 왜냐하면 이들은 과학적 탐구의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역사비평 방법은 과학적 신학으로 인정되기를 요구하며 더 나아가서는 자신이 유일한 과학적 신학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공관복음의 내용들이 비슷하다는 점과 마태의 Q문서의 사용여부 등이 있다. 그렇다면 왜 성경비평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경비평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만 성경비판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간주하고 있고, 사회개혁자 혹은 혁명가 정도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 있는 대로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자는 우리의 주님이,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확실하게 믿는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가 알건 모르건 자신의 도구로 사용하시면서 역사를 운행해 나가시는 것을 분명하게 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역사 안에서의 행위와 연관되어 있지만 그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에 따른 역사적인 결과가 있다. 역사비평 신학자에게는 예수님 부활의 영향이 단지 자기 제자와 이들에 의해 부활을 알게 된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만 미치는 것이다. “예수가 살아 있다.” 라는 말은 그에게는 단지 예수가 역사안에서 영향이 있다는 것만 의미한다.
2부에서는 잘못된 기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역사비평 신학의 중요한 기초는 레싱의 역사 철학인데 「인류의 교육」이라는 책이다. 인간이 드이어 이성을 완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런 의식은 계몽주의 우월의식이며, 이것은 후에 칸트에 의해 스스로 자초한 유아적 사고로부터 용기를 가지고 나오라고 한 격려문에 표현되었으며, 레싱에 의해서는 역사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일반 역사과학에서는 더 이상 이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역사비평 신학에서는 오늘날까지도 이런 생각이 지배적이다. 계몽주의 역사 개념이 신학 안으로 들어온 것은 제일 먼저 그리스바하의 신학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는 “레싱의 역사적으로 진보한다는 생각에 동조하면서” 사용가설을 세웠다. “복음서의 저자에 관한 전통적 학설이 모든 현대의 가설보다 우월하지만, 그 이상을 넘어가는 복음서의 기원에 대한 고대 교회의 정보는 가치가 없는 신화라고 한다.” 그리스바하가 자신의 사용가설이 고대 교회 전승을 근거로 판단을 받지 못하도록 자신을 보호한 이 주장은 역사비평 신학의 공리가 되었다. 양식비평은 신구약에 대한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토양에서 성장한 것이며 나중에 가서야 성경해석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의 뿌리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고안된, 문제시되는 통속 문학의 발생에 대한 견해다. 신학이 관념론적인 역사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복음서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되자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는데 복음서를 전체로서 그의 역사적인 신빙성의 여부가 조사된 것뿐만이 아니라, 복음서의 각 권마다 진위를 묻게 되었다. 개별적 전승이라는 이름으로 각 부분이 서로 독립하게 되면서 양식사의 전제가 만들어 졌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시던 일을 목격자가 신실하게 전달했다는 사실은 이제 무시되었다. 복음서에 쓰여 있는 것을 이제는 하나님의 계시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자료에 불과했으며, 이 자료를 사용해서 성경비판 신학자가 자기 판단대로 ‘예수의 생애’를 구성하고자 자신의 예수를 만들게 되었다. 이 신학자들은 ‘예수의 생애’를 그리기 위한 소재를 성경에서 자의적으로 선정해서 사용했으므로 소위 ‘예수의 생애’는 신학자 자신의 생각이 반영될 뿐이었다. 결국 이런 자의는 완전한 파산으로 귀결되었다.
구약의 양식사는 조상에 대한 역사적은 보도를 상상의 산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주신 계시를 하나의 허구로 만들었다. 이것은 가정이라는 도구를 사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증명되지 않은 추정은 주장을 뿐이고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은 거짓이다. 양식사의 거짓 추정은 그것이 마치 과학적인 연구 결과인 것처럼 오늘날까지 신학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다. 반면에 신약의 양식사는 삼 년 만에 세 권의 책에 의해 확립되었는데, 신약의 양식사는 단지 주장을 증명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만 양식사의 신약 성경 형성에 대한 주장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양식사는 역사라는 발판을 잃어버린 것이다. 계몽주의적-관념주의적 역사 구성은 그 기반 위에 역사비평 신학이 열심을 다해 그들의 건물을 지어 놓은 잘못된 기반이다. 문학비평, 양식사, 편집사가 그것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이 건물을 개선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여기를 조금 헐고 저기를 증축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예 잘못된 기초를 떠나야 한다. 이제 가정 위에 집을 짓지 말고 사실로 돌아올 때가 되었다. 이 사실은 비록 모든 사람이 만족할 만큼 다양하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믿을 만한 기초가 된다. 예수님, 우리의 주님은 공개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다. 그분이 말씀하시고 행동하신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기억하고 보도한 증인들이 있었다. 우리의 4복음서는 여기에 근거한다. 역사비평 신학은 과학적으로 일하지 않고 선입관을 붙들기로 맹세했다. 그들은 문학비평을 통해 복음서를 문학 서적으로 간주함으로써 증인을 횡령했고, 그들 자신을 역사로부터 소외시켰다. 누구든지 역사를 이해하려는 자는 증인을 존중해야 한다. 역사비평 신학은 마치 증인이 없었던 것처럼 행한다. 그들은 증인이 억지로 없다고 함으로써 자신을 역사에 대해 장님으로 만든다. 복음서가 서로 베껴 쓰거나 다른 문서들을 편집함으로써 생성되었다는 주장은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가 아니다. 역사비평 신학은 단지 가정을 근거로 일하며, 그것은 철학으로부터 차용해 온 선입관을 근거로 한 억측이다.
양식사의 기본 원칙은 이것들이 과연 소위 ‘방법’에 기초한 과학적인 결과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만 예를 들어 시초에는 단지 각각의 독립된 전승만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첫째, 독립된 개별 전승의 존재는 증명되지 않는다. 둘째, 개별 전승은 보편적인 경우가 아니고, 셋째로 익명의 개별 전승은 복음서의 구성 요소가 아니다. 한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관점으로 방법이라는 이름으로 접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올 때에는 그 방법이 잘못된 것으로 판정이 난다. 양식사와 문학비평은 복음서를 다루는 방법에서 서로 모순된다. 이것으로 해서 이 두 가지는 과학적인 방법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양식사는 구전으로 내려온 공관 복음 전승의 존재를 그 이론의 근간으로 삼는다. 이것은 서로 독립되고, 저자 이름 없이 내려오는 단독 전승이 모인 것인데, 이것 중에 몇 개는 역사적 예수와 관계가 있지만, 대부분은 ‘창조적 공동체’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것은 공관 복음전승이 만들어질 당시에 예수님의 활동을 본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증인의 진술을 부인함으로써 그들은 자신을 역사적인 사실과 모순되게 만든다. 공관 복음 전승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억측이다. 이것은 50년이 안 되는 그들의 전승 기간에 그의 내재하는 법칙에 의해 몇 번이고 변형을 가져왔다고 한다. 나중에 변형된 버전이 먼저 생성된 버전을 밀어내지 않고 이 모든 것이 공관 복음에 들어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승 개체가 앞뒤에 도입 부분이나 결론 부분이 없이 유포되어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증인들이 살아 있을 당시에 예수 어록이나 예수 행전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편집사적인 연구의 목적은 ‘현재 상태 있는 그대로의 복음서를 밝히는 것’이며, 이것으로 복음서 저자의 의도를 밝히고 또한 ‘교회의 발전단계에서 각각 저자 고유의 역사적 자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편집사는 복음서 저자가 신학적인 의도가 있으며, 이 의도가 복음서에 반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런 억측은 유사한 기사들이 복음서마다 서로 순서가 다르고, 각 단락마다 다른 복음서와 서술이 차이가 나는 이유를 설명하고, 기자가 사건을 자신의 신학의 윤곽을 드러낼 정도로 창조적으로 배열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이런 억측이 소위 편집사적 방법의 토대다. 편집사는 복음서 기자의 신학을 공동체의 요구에 대한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편집사적 방법은 부당하게도 복음서가 쓰일 즈음에는 증인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방법은 단지 역사비평 신학이 복음서에서 신화적인 것과 사실을 구분하려고 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200여 년 전에 신학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사고의 기반으로 삼지 않고 단지 사고의 대상으로 삼고자 결정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원자요, 심판자임을 부인하고, 인간사에서 하나님의 활동을 제외하는 무신론적인 철학을 사고의 기반으로 삼았다. 신학이 역사비평 방법으로 확립되고 자신을 과학이라고 주장하게 되자, 그는 공관 복음을 연구함에서 사실에 근거한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계몽철학으로부터 넘겨받은 선입관을 그 대상에 적용했다. 문학비평, 양식사와 편집사의 기초는 역사에서 하나님의 행동과 그분의 기적을 부인하고 성경을 하나의 고전으로 취급한 것이다. 그 결과 복음서를 신화와 사실이 혼합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증인도 부인하게 되었고, 이 방법을 적용하는 것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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