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북한편(제 7장)] - 강요된 행진, 당의 기초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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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북한편(제 7장)] - 강요된 행진, 당의 기초 확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공산주의운동사 3 : 북한편]
I.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제7장 강요된 행진
1. 당의 재건 -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인적자원이 고갈되어 있었고, 경제복구를 위한 여건도 결여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를 시인하면서 사상무장과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생산문화의 수립을 제시했다. 엄격한 책벌과 포상제도로 강화된 사업규율은 당 일꾼들의 사고와 생활에 스며들었다. 1955년말 조선노동당의 당원수는 1백만명으로 급증했다. 당원 훈련을 체계화하고, 대중통제를 위해 자백운동을 권유하였다. 당시 북한은 남한의 실정을 왜곡할 수 있었고, 1959년에는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을 세분화하였고, 지식계급에 대해 새로운 인텔리를 적극 육성한다고 강조했다.
2. 전후 초기의 최고 정치 엘리트 - 1953년 숙청 이후 김두봉은 명목상 혁명지도자였고, 그 밑의 고위 간부는 박정애, 최용건, 박창옥, 김일, 최창익이었다. 출신배경에 따른 다양한 차이와 종파문제가 당시 중대한 문제였고, 소련파와 연안파는 남아 있었으나 국내파는 최고 지위에 남아 있지 못했다. 경제복구와 당재건이라는 과제를 안고, 북한 정치는 매우 단합되어 있었다.
3. 당의 기초 확립 - 전쟁으로 부서진 지방의 당조직을 재건할 과제를 안고, 1954년 각급 당위원 선거, 1955년 지방선거가 실시되었고, 1956년 전국 각급 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1957년 초 당은 지방조직이 현저히 개선되었다고 주장했고, 중국의 영향으로 당의 주관 하에 각 지방에서 국가정책을 토의하는 회합을 열성자대회라는 명목으로 자주 개최하였다. 당원을 교화 통제하기 위하여 당증재교부 사업이 1957년 실시되었고, 주기적으로 이루어졌다. 성인교육과 의무교육을 향상시켰다. 1958년말에는 새로운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인민을 육성하여 국가계획을 떠맡기려 하였다. 구시대의 잔재를 비판하면서 당의 일꾼들에게 견디기 힘든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지방의 모든 물적, 인적 자원을 철저히 동원하도록 지방기관에게 책임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북한식 현장관리이다. 기적을 이룰 것을 강요받고 있던 요원들은 허위 보고, 주민들에 대한 압력으로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4. 군소정당과 통일전선 - 당 최고 간부들의 두 번째 관심사는 통일전선 활동 강화였다. 조선민주당과 천도교청우당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통일전선에 의한 정권이라는 허구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엄중한 감시의 대상이었고, 공산당과 별개의 정당으로 활동하지 못했다. 남한에서 월북한 정객들은 대게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숙청되었다. 통일전선적 조직체로 구성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과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는 남한 인민들의 대상으로 한 결의안을 주기적으로 통과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으나 1958년말부터 걸쳐 역시 숙청되거나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통일전선은 정통적인 공산주의 조직으로 변질되어 갔다.
5. 당의 대 사회단체 정책 - 당은 청년, 여성, 산업노동자, 농민, 지식인 등 다섯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 이들 사회단체들을 당의 대리인으로 당의 연장선상에서 취급하였고, 자기 집단의 이익을 주장하지 못했다.
6. 특수문제로서의 지식인 문제 -지식인들도 전국적으로 단체를 조직하였으나 남한 출신들이나 연안파, 소련파에 경도되어 있어 종파 투쟁으로 파급되었고, 김일성은 1955년 4월 전원회의 연설에서 계급교양을 강화해야 하는데 교육이 부족하였다고 지적하고 지식인 전체에 대하여도 부르조아적 교육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광범위한 회의를 보였다.
7. 군과 정치 - 군부와 관련된 기본적인 정치동향은 김일성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배양하고, 소련군과 중공군에 대한 영웅적인 찬사, 인민과 군의 밀접화 노력이었고, 1956년~58년 사이에 장평산의 쿠테타 시도 혐의와 육군대학 교수들의 발언에 대한 숙청 사건이 있었으나 김일성은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8. 당내 무기로서의 민족주의의 등장 -김일성은 1955년 4월 전원회의에서 종파주의를 비난하였고, 그해 말 박헌영을 처형한 후 중요한 연설을 한다. 조선역사 연구와 전통을 강조하면서 조선혁명운동에 종사한 사람들을 높이 평가하고, 애국주의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9. 탈 스탈린화와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 -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가 도를 넘어선 상황에서 소련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쵸프의 스탈린 비판이 이루어지고, 1956년 4월 23일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김일성은 개인숭배의 책임을 종파주의자들에게 전가하고, 집체적 지도를 강조했다.
10. 1956년 당시 조선노동당의 성격- 제3차 당대회의 구성원들은 70%가 소학교 졸업, 대졸은 8%에 지나지 않았고, 대부분이 1945년 이후 혁명운동을 시작한 자들로서 김일성은 전후세대에게 유일한 혁명지도자로서 본받을 대상이었고, 선출된 중앙위원들의 교체폭은 크지 않았다. 김일성이 절대적으로 신임하는 사람들이 당과 정부의 요소요소에 있었고, 연안파 출신이 영향력이 신장되어 있었으나 얼마 안 있어 숙청되고, 결국 각 파벌 중 김일성에게 가담한 사람들만이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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