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

 1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1
 2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2
 3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3
 4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4
 5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5
 6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6
 7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7
 8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8
 9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9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 레포트 > 독후감
  • 2015.03.29
  • 9페이지 / hwp
  • 1,200원
  • 36원 (구매자료 3% 적립)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독서 감상문]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
스칼라피노이정식 공저
한 홍 구 옮김
< 목 차 >
Ⅰ.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Ⅱ. 강독 소감
Ⅲ. 연구 성과 및 한계
Ⅳ. 문제 제기
Ⅰ.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3 - 북한 편』은 전후(戰後) 북한 사회의 수립에 관하여 연구한 것이다. 전후 재건사업에서부터 김일성 1인 독재체제 구축 과정에 대한 심도 있는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했던 조국 해방전쟁에서 패배는 사실상 북한을 폐허로 만들었으며, 내부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과 그의 세력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며 김일성 유일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유래 없는 공산주의 독재국가를 유지해 오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완전한 이해하기 위해 북한의 처음을 연구할 의미가 있는 것이다.
1. 제 7장 강요된 행진
한국전쟁이 끝난 뒤의 5년간 북한에서는 중요한 정치경제적 변화가 일어났다. 1958년 공산주의 최고 지도자들 중 마지막 남은 파벌이 제거된 뒤 김일성은 마침내 아무도 넘볼 수 없는 권력과 권위를 차지했다. 김일성은 특유의 정치적 감각으로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아는 인물이었다.
1953년 8월에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제 6차 전원회의 이후 몇 달간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성공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당의 ‘강철’ 같은 단결이 필요하다는 데 정치적 주안점을 두었다. 당은 당원 교양사업을 점차 강화하는 한편 관료주의, 형식주의에 대한 투쟁을 가속화 시켰으며 ‘침략자’에 대한 인민의 적개심을 북돋았다.
전후 복구 사업을 주도한 김일성은 사회 곳곳의 만연한 부정부패,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을 하며 전면에서 사업을 진행하였다. 당시 그의 생각은 주로 ‘로동신문’ 사설 등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내부 사정은 심각한 인재 부족난을 겪고 있었다. 전쟁 기간부터 시작된 종파주의 비판과 세력의 숙청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기회이면서 동시에 많은 인재를 잃을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그나마 한국전쟁을 통해 북한이 확실히 얻은 것이라면 북한 내의 거의 모든 반공주의자들이 제거되거나 월남해 버린 것이다. 북한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정권을 지지하거나, 아니면 북한에 남아 있어야 할 절박한 개인적 사정을 지닌 자들이었다.
전후 북한의 엘리트들의 개별 신상과 특징은 생략한다. 이 당시의 정권 담당자들은 한 손에는 경제복구를, 다른 한 손에는 당 재건이란 과제를 안고 있었다. 내각 수상이자 당 위원장이었던 김일성은 확고한 자신을 갖고 권력을 행사하면서 두 가지 과제를 이루어 나가는 데 지도자로 군림했다.
1958년이 저물어갈 무렵, 북한의 지도자들은 북한 주민들의 정치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경제계획의 목표를 실현할 자원을 갖고 있지 못했던 국가는 이제 지방기관에 책임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북한식 ‘현장관리’의 진정한 의미이다. 당연히 대부분의 지방기관은 중앙당국이 만족할 정도로 자신들에게 부과된 책임을 완수할 수가 없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기적을 이룰 것을 강요받고 있던 일선의 기간요원들은 별 수 없이 실적을 허위로 보고하고 주민들에게 압력을 전가시키면서 국가를 대대적으로 기만하게 되었고, 이 같은 체제의 결과는 발전과 원한과 공포가 뒤얽힌 것으로 나타났다.
공산주의자들이 군소정당에서 기대했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통일전선적인 조직체였다. 이 같은 형태의 조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하 조국전선)이었다. 조국전선은 1949년 7월 25일 북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1946년 7월 22일 공산주의자들이 결성)과 1949년 이전 월북한 남조선민주주의민족전선이 통합하여 결성된 것이다. 명목상 모든 정치단체를 망라했던 이 새로운 조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모든 조선 인민의 대표자이자 정부라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기능을 지닌 단체였다. 주기적으로 열린 이 단체의 회합은 통일과 ‘인민민주주의’를 주조로 남한 인민들에게 광범위한 국내문제를 호소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주력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청년, 여성, 산업노동자, 농민, 지식인 등 다섯 분야에 중점을 두었다. 1960년 공산주의자들은 조선민주청년동맹의 회원 수가 노동당원비당원을 망라하여 모두 150만 명이라고 주장했다. 실로 이 조직은 거의 모든 지방에서 군대, 공장, 농어촌 내부에 세포조직을 가진 조선노동당의 중요한 무기였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사회단체들을 당의 대리인으로 당의 연장선상에서 취급했다. 한국전쟁 기간 중의 엄청난 손실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민군은 전쟁이 끝났을 당시 당 외부에 존재하는 유일한 전국적인 조직체였다. 인민군은 최고 권력을 유지하는데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