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3장~4장) - 김일성의 중공업우선 노선 및 농업집단화 착수 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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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3장~4장) - 김일성의 중공업우선 노선 및 농업집단화 착수 방침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북조선사회주의 체제성립사 1945~1961
(3장~4장)
□ 강독한 저작의 주요내용 및 논지 요약
제3장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1. 625전쟁과 정치세력관계의 변화
625전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통치영역을 확대함으로써 한반도 전역의 ‘완정(完整)’을 목표로 한 내전으로 북조선의 38선 이남에 대한 전면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이 시기 북한은 1950년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 ‘군사위원회 조직에 관하여’를 채택하여 공화국의 내각과 국가중앙기관, 각 도시의 지방군정부를 군사위원회에 배속하여 중앙집권적인 전시동원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또한 경제 분야에서는 전시생산체제의 확립에 주력하고 광범위한 대중을 동원하는 전시원호사업도 군사위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갔다. 군사위원회와는 별개로 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정치위원회는 전쟁 중에도 당의 정비, 강화를 힘을 쏟고 있었고,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중요시기마다 전쟁 수행상황에 대해 총괄하는 공간으로서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개전 전후의 군 지휘 계통에 관해서는 세 계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만주파, 소련계 조선인, 연안계 군인이지만 이러한 공식적인 군사지휘체계가 바로 전쟁 발발의 의사결정 과정을 해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북조선에서 625전쟁 당시 ‘공격’의 내부 결정이 어떤 절차를 밟아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완전히 베일에 덮여 있다. 다만 최근의 중국, 소련 측에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정보가 공개되어 중국과 소련의 역할 등에 대해서 밝혀지고 있어서 북조선의 선제공격설은 이제 공식적인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전쟁은 북조선 측의 전격적 전술이 주효하여 인민군의 일방적인 우세 하에 진행되어 개전 3일 째에 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점령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6월 27일 즉각 참전을 결정하고 유엔의 결의에 따라 전쟁은 국제적으로 확대되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전까지 북조선을 압록강변까지 패주시켰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참전 이후에는 북조선은 다시 서울까지 남진하여 적의 점령으로부터 회복한 지역의 안정을 꾀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을 수 있었다. 이 때 자강도에서는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를 소집하여 전쟁 책임을 묻게 되는데 전쟁 초기 적의 후방에서 대중봉기와 빨치산 투쟁이 일어나지 않은 점과 유엔군에 의해 북조선의 거의 전 지역이 일시 점령된 점이 주요 쟁점이었다. 김일성은 자기의 과오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박헌영에게도 직접적인 책임추궁을 하지 않고 일선의 빨치산부대의 지휘관을 비판하고 인민군의 패배는 유엔군의 우세함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로 미묘한 초점을 피하면서 전쟁과정 전체를 정리하여 책임을 묻는 방식을 취했다.
1951년 6월 중순 전선이 38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되면서 북조선은 통치 기반 전반을 총정리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특히 허가이가 주도한 당원재등록 사업 과정에 대한 비판을 통해 당의 대중적 성격을 강조하여 당원 확대를 시도하였다. 그로 인해 그 동안 당에서 제명된 사람들 대부분을 복당시키고, 새롭게 농민층을 대거 입당시키는 조치를 취해 1950년 말에서 1951년 초까지 전쟁 책임으로 궁지에 몰린 입장에서 반격에 착수하고 있었다.
2. 625전쟁과 당군관계
전쟁발발을 전후하여 상당수의 당 간부가 군의 정치간부직에 취임하여 당을 군에 더욱 접근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당 내의 각 정파 역시 자체의 군사적 기반을 준비하면서 그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디고 있던 점에서, 북조선 측에서 보며 625 전쟁은 이상적으로 연안계의 협력 아래 만주파가 장악하고 소련계가 실무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정규군형의 군대, 연안계가 지휘하고 있던 인민전쟁형의 군대, 남로계가 목표로 한 유격전형의 병력 및 대중봉기형의 지하조직을 결합하려고 한 것이다.
군 내의 정치사업은 기본적으로 전쟁 발발 시까지 문화부를 통해 이루어졌으나 625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군 내 당조직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하여 큰 변화가 이루어진 계기는 인민군의 패주와 중공군의 참전이었다. 전쟁 수행에 대한 군대의 지휘통수권 문제가 발생하는데 소련의 개입과 김일성의 동의로 조중 연합사령부를 구성한다. 연합사령부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와 조선인민군 참모부의 두 기구로 구성되었으나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다. 이 때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기 위한 목적으로 연합사령부에 참여하지 않았다.
김일성은 중국의 개입이 북조선을 존망의 위기에서 구해주었지만 연합사령부 설치가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고 위신도 상처가 입었다. 아울러 군 내에서의 정치위원 및 군당제도를 중국식으로 변화되어 김일성이 군사위원회에 전체를 집중시켜 군에 대한 통제도 완전히 수중에 넣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연합사령부 창설로 군사적 지휘권과 함께 정치적 통제권도 빼앗기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내의 정치위원 및 군당제도가 단위부대 수준에서는 군사지휘관과 정치장교 사이에 많은 마찰이 생기고 있었다. 이러한 마찰은 김일성의 군에 대한 정치적 통제권을 되찾기 위한 노력과 중국이 김일성을 중심으로 1953년의 휴전교섭을 임하기로 결정했다는 점에서 김일성은 군에 대한 통제권을 대내적으로 완전히 되찾게 된다.
3. 전쟁의 정치군사적 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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