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해방후 편(4~6장)] - 한국의 공산주의 배경, 과정, 조선민공화국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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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해방후 편(4~6장)] - 한국의 공산주의 배경, 과정, 조선민공화국의 출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 : 해방후 편]
1. 주요 내용 및 논지 요약
가. 제4장 미군정기의 공산주의
조선인민공화국의 출현 : 광복이 되자 여운형과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지방조직이 인민위원회였으며, 송진우가 지도하는 온건주의자들은 한국민주당을 결성했다. 1945년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려 조선인민공화국이 탄생되었고, 좌익은 이를 매개로한 공산당의 성공을 낙관하고 있었다.
남한에서의 공산당의 출현 : 박헌영은 1945년 8월 19일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2단계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광범위한 민주주의적 인민전선이 만들어져 부르조아 단계가 완성되도록 지도한 후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었다.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심각한 문제는 해묵은 분파주의였다. 미국의 초기 정책과 한국의 좌익 : 미 점령군은 9월 9일 한국에 도착했고, 군정관리들은 조선인민공화국을 공산당이 조종하는 것으로 간주했는데, 실제로도 공산주의자의 역할은 확장, 심화되어 갔고, 박헌영이 이를 주도하고 있었다.
공산당의 강령 : 박헌영은 9월 11일 장안파와의 통합 조선공산당의 결성을 발표하고 4개 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박헌영과 서울이 조선공산당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졌다 해도, 남한을 지배한 것은 미국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운동의 권위의 중심이 평양-모스크바에 있었다. 소련의 지배는 공산당에 대해 전국적이었다.
파벌투쟁 : 장안파 지도자들은 10월경 박헌영의 재건파를 공격하였지만, 10월 13일 열린 북조선 5도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가 평양에서 열려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도 중요한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수뇌로 인정받았다. 이 회의에서 북조선분국이 창설되었고, 김일성은 10월 14일 평양에서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대해 장안파는 우익측으로 기울어져 보수 3당 연합과의 접촉을 시도하였으나 보수당을 이용할만한 세력이 부족했고, 결국 11월 24일경 해체한다.
당과 외곽단체의 강화 : 남한에서 공산당의 세력은 46년 1월경 2~3만 명, 47년 9월경 3~4만 명 정도로 추정된다. 45년 9월 초순경 노동자 조직이 시작되었고, 11월경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결성대회가 열렸다. 46년 5월 25일에는 북조선직업총동맹이 결성되었고, 그 동안 45년 12월 8일 전국농민조합총연맹 결성대회가 개최되었고, 토지개혁에 대한 입장을 포함한 행동강령이 채택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농민의 마음을 끄는데 유리하였으나 한편으로 지식인이나 학생들이 주도하는 폭력적 활동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45년 8월 18일에는 조선학도대가 결성되고,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이 창설되었다. 12월 11일 조선청년단체총동맹이 결성되었고, 46년 4월 25일 조선민주청년동맹이 좌익에 의해 조직되었다. 45년 12월 22일에는 조선부녀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좌익은 지방이나 도인민위원회의 구성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그 구성원은 대게 중등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었다.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비좌익의 대부분이 떨어져나갔고, 미군정은 고문을 임명하는 방식을 취하고, 10월 10일 강경한 성명을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의 권위를 부인하였다. 여운형은 11월 12일 조선인민공화국에서의 직을 사임한 후 조선인민당을 결성하였고, 인민공화국은 전국대회를 열었으나 미군정당국은 11월 25일 조선인민공화국을 불법화시킨다.
경쟁적 합작공세 : 공산당은 발전적 해소의 원칙을 가지고 민족반역자와 반동분자를 제외한 모든 인민의 새로운 민족통일전성의 수립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승만으로 상징되는 우익의 입장은 내부적 단합을 강조하고, 완전한 통일과 즉시 독립을 완강히 주장하였다. 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되었고, 한국의 반응은 반탁이었다. 그러나 46년 1월 1일과 3일 사이 공산당 지도부는 모스크바의 결정을 절대지지하는 입장으로 전환하였고, 그 와중에도 정치적 합작이 계속 추진되었으나 신탁통치 문제로 합작이 결렬되어 신탁통치는 우익에게 이익을 주고, 좌익에게 손실을 주게 된다. 2월 14일 민주위원이 결성되고, 다음날 좌익 기구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이 출범한다. 좌우합작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박헌영은 반합장 입장이었고, 9월 14일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하고, 전국적인 파업을 시작한다. 여운형은 그 무렵 평양을 다녀와 좌우합작 7원칙을 내놓았으나 정치적 교착상태가 계속되고, 여운형은 정치은퇴를 선언한다.
남한공산당 내부의 투쟁 : 46년 5월 초경 미소공위가 결렬된 결과 미군정과 남한 공산당 관게는 악화되었고, 당 내부에서 조봉암이 박헌영의 전술을 비난하는 도전이 있었다. 6월경 평양에 다녀온 박헌영은 조공 내부의 반대파를 공격하였고, 반박헌영파는 9월경 당 대회가 열려 중앙위원을 새로 선임하였으나, 11월 13일 이후 박헌영에 의해 남로당이 출범하였고, 이 무렵에는 이미 이미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지하로 들어간 상태였다.
남로당의 조직구조 : 중앙상무위원회가 중앙정치위원회의 결정사항의 집행을 담당하였고, 그 밑에 13개의 부서가 짜여져 있었다. 전국조직 밑에 지방위원회 내지 구역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남로당과 미군정간의 격증하는 충돌 : 46년 5월 6일 조선정판사 사건으로 공산당 간부들을 포함한 다수의 공산당원들이 연루되어 재판을 받았다. 공산당이 좌경화될수록 미군정도 강경대응하여 9월 7일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되었으나 47년까지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용인되었고,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이 계속되었다. 4월경 미소공위가 재개되었을 때 남로당은 당원 5배가 운동을 벌였고, 7월 15일 미소공위가 결렬된 후 남로당은 48년 2월 다시 총파업이 촉구되어 5월 선거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던 내내 폭력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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