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선의 전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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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태선의 전도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박태선의 전도관
1. 천막집회에서 전도관 설립까지
자칭 ‘감람나무’ 박태선이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1955년이었다. 625 동란으로 피난살이 갔다가 귀향하여 마음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마음에 위안 받을 곳이 없었던 당시의 사회상이었다. 박씨의 비위를 거스리며 장애물이 된 것은 신문기자들이었다. 예배 인도하는 단상에서 정면으로 기자들을 저주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박씨도 투옥되고 800여명의 신도들도 투옥되어 옥고를 치뤘다. 당시 마포형무소 기결감방에서 복역중인 박씨는 자유당의 알선으로 전국 전도사를 소환하여 매일 연속적으로 1회에 30명씩 한꺼번에 면회를 하며 자유당의 이기붕을 선거에 지지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그 후 일단 출옥하였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민주당 정부때 3차 복역하여 전과자가 되었던 것이다. 소위 주의 종을 자처하는 감람나무는 정치에 아부하여 징역을 면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세 번째 투옥되었다가 출옥한 박씨는 신도들에게 권위를 잃지 않았나 살피며 차원을 달리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 신앙촌 확장과 덕소에 제2신앙촌의 건설이었다. 박씨는 신앙부흥운동을 통하여 긴 안목으로 미래를 꿈 꾸었다. 이 땅에 주님의 세계를 이루려면 우선 경제권을 잡아야 한다고 신도들에게 외쳤다. 투옥 수감중에 신앙촌 입주자를 비롯하여 신도중에 간부급이 모여 한국예수교총회를 조직하여 자치 운영할 수 있도록 옥중 면회를 통해서 승낙 받은 후 조직 작성을 했다. 그러나 그 후 출옥하여 그 조직은 자기를 대항하려는 조직이라고 뒤집어 씌워서 해체 시키고 말았다. 그 당시 박씨는 총회 간부급들을 마귀로 몰아서 대중앞에 선포한 다음 매장하고 말았다. 이것은 마치 공산국가에서 숙청하는 방법과 흡사하다고 하겠다. 김경래, 탁명환 공저,「이것이 박태선 전도관이다」(신흥종교연구소), 28-31.
2. 사업발전으로 치부하는 박태선
소사 신앙촌을 건설하고 투옥되기까지 박씨는 벌써 자기 명의로 막대한 축재를 해 놓았다는 사실은 후일에 출옥하여 덕소 신앙촌을 건설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비밀 제일주의로 하는 박씨가 신도에게 주님의 권능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주의 종 됨을 과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박씨가 경영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결사적으로 무조건 협력하도록 함으로써 사업을 한없이 확장시켰다. 박씨의 사업체는 전국에 있는 전도관 신도들을 동원하여 판매요원을 만들어 판로는 쉽게 개척되었다. 그리하여 신도들에게 의무적으로 신앙촌 생산품을 판매토록 강요했다. 안찰효험과 인기에 편승하여 상품 매상액수에 따라 제일 많이 파는 신도에게 안찰을 해주었다. 지방 전도관의 전도사들끼리 사업경쟁을 시켰다. 전도사는 사업에 경험이 없으므로 신도들에게 외상으로 판매했다가 대금 회수는 안 되고 신도는 신앙이 떨어지고 손해를 많이 봤다. 그럴때는 전도사가 주님 사업에 손해를 끼쳤다고 마귀라고 규정해서 내어 쫓는다. 김경래, 탁명환 공저,「이것이 박태선 전도관이다」(신흥종교연구소), 32.
3. 덕소 제2신앙촌 건설의 내면상
박씨가 주장하는 신앙체계로서 제일 제이 제삼 울타리를 말한 바 있다. 그것의 실현이 곧 신앙촌이다. 단계적인 신앙으로 키워 올리기 위한 구상이다. 박씨는 옥고를 치루고 신앙도는 저하되어 불평불만 분자가 생겼음으로 일종의 각성제로 삼기 위해 덕소에 제2신앙촌을 급속도로 건설하고 신도의 신앙을 재정비하여 열성분자를 추려서 덕소로 이주시키고 사기가 저하된 자들의 열성을 촉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소사의 잔유 부대는 반발과 원망으로 소사 신앙촌은 점차적으로 일반사회화 하여 가고 신앙촌이란 이미지마저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신도들은 소사에서 3년간 육체적 봉사를 했고 덕소로 와서 계속 봉사하는 동안 육체는 한도가 있는데 노력은 도를 너무 지나쳐 약해졌다. 박씨는 원래 철공업을 해온 이로서 제강업체 진출을 꿈꾸고 공장을 아주 조잡하게 세우고 한편으로는 강원도에 광산을 사서 철관제조를 계획했다. 이전부터 주장하기를 하나님이 주신 땅과 바다에 한없는 지하자원이 있는데 하나님이 사업에 축복해 주셔서 자기를 통하여 발굴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느 하나 계획성 있는 합리적 경영관리가 못 되고 즉흥적인 방법으로 일인 단독 계획하니 운영이 엉망이 되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여하튼 덕소 신앙촌을 통하여 박씨의 기반은 굳게 다져졌다고 하겠다. 김경래, 탁명환 공저,「이것이 박태선 전도관이다」(신흥종교연구소), 33-34.
4. 신앙체계의 변모 시작
월 2 회씩 전국 전도사를 회집하는데 ‘축복일’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실상은 물품 대금 수금날이다. 이 날만 되면 각 도관장들은 자기의 책임 완수를 위해 혈안이 된다. 각기 자기 구역 산하 전도사들에게 대금 미납되는 경우가 생기면 그야말로 수라장이 벌어진다. 물품대금 입금성적의 순위에 따라 시상을 하여 경쟁을 지키기도 한다. 박태선 교단의 기관지인 ‘국제기독교 뉴-스’에 매상 실적을 전도실적이라고 순위를 크게 보도 한다. 박씨의 신앙체계에서 죄의 근본이 사대욕망이다. 첫째는 식욕, 둘째는 재물욕, 셋째는 정욕, 넷째는 명예욕이다. 주님 사업이란 미명아래 신도들을 종횡 무진으로 혹사하며 전국 전도사에게 금전 모아 드리는 명령을 한다. 때로는 수표부도의 위기라고 각 도관장에게 지령하면 수시간내로 수백만원이고 수천만원이고 은행 구좌에 입금 또는 송금해 주어야 그 직위를 보전할 수가 있다. 박씨는 사업이 잘 되면 자기가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서 되었다고 하고 잘못되면 전부가 신도들이 잘 협력하지 않고 마귀 역사가 끼어서 안 된다고 단상에서 야단을 친다. 신도들은 왜 욕하는지 모르고 욕을 얻어 먹는다. 또 박씨 체계에는 좋은 조건과 나쁜 조건이 있어서 그 조건을 환경에 따라 박씨 마음대로 변했다고 발표한다. 박태선은 자기가 감람나무요, 이긴자이니 자기를 통하지 않고는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가르치고 감람나무를 통해서 은혜를 충만히 받은 자는 죽어도 썩지 않고 또 죽지도 않는다고 호언 장담해 온 고로 우매한 신도들은 박씨를 절대자이며 영생불사하는 존재로 믿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신으로 믿었다. 그쯤 된 박씨는 신앙문제에 관한한 자유자재로 해결하며 사업문제와 신앙과 억지로 결부시키는 일이 허다하다. 신앙이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기원이 되어 모든 것이 행해져야 하겠는데, 신앙촌은 냉정을 일 삼아서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손톱만치도 찾아볼 수가 없다. 처음에 박씨가 부르짖을 때 행하고 보여주던 사랑과 자비는 토대가 잡힌 후에는 찾아볼 수조차 없다. 이것을 변명하기를 신앙이 어릴 때과 장성한 후에 대하는 차이라고 말한다. 김경래, 탁명환 공저,「이것이 박태선 전도관이다」(신흥종교연구소), 35-36.
5. 하나도 들어맞지 않은 엉터리 예언
박씨는 처음 신흥기에 인기를 모으기 위하여 수많은 예언을 했다. 그러나 박씨는 앞으로 설계하는 노선을 예상한 나머지 다른 예언자들처럼 언제 모 사건이 생긴다는 식의 예언을 하지 않고 악조건 호조건 경우를 설정해 놓고 환경과 시기에 따라서 변경시킬 수 있는 신축성 있는 식의 고무줄식의 예언을 해왔다. 실례를 들면 소사 신앙촌을 건설하고 입주자가 앞을 다투어 입주토록 하기 위해 앞으로는 외국 사람이 찾아오는데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어서 왔다 가는 이들이 떨어뜨리고 가는 부스러기만 가지고도 입주자들이 쓰고 먹고 남는다고 호언장담했다. 즉흥적으로 인기전술을 구사하여 한 말이 예언으로 존귀하게 받아들여졌다. 자기에게는 하나님과 주님이 같이 하므로 불가능이 없다고 하면서 만유 능력자인양 외쳤다. 초창기에 부산에서 부흥집회를 가질 때 어업을 경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신 자원을 끌어드리는 일이라고 설교한 후 집사를 시켜 어장을 경영했으나 큰 실패을 했다. 결국 망신만 당하고 말았다. 처음에 모여든 신도 가운데는 극성스러운 사람들이 박씨가 하나님과 주님과 같이 있는 꿈을 꾸었다고 진언하자 박씨는 틀림없는 계시라고 그 내용을 대중 앞에 소개했다. 믿음이 얼마나 좋으면 계시를 보느냐고 신도들은 부러워했다. 반대로 박씨에게 불리한 악몽이라도 말하면 그것은 마귀가 준 꿈이라고 묵살시켜 버렸다. 이렇게 되자 신도중에 허위로 꿈을 조작하여 박씨의 비위를 맞추려는 자도 생겨났다. 신도 자녀는 교육시키지 말라고 하고 자기 자녀는 돈을 아낌없이 드려 교육시켰고, 신도중에는 굶는 사람도 있고 생활이 딱한 사람도 많았다. 그런 사회에서 성금을 모아 바친 돈으로 자기 자식의 피아노 독주회는 최고 호화판으로 신도를 동원하여 입장료를 내고 관람하게 하는 등 처사는 마치 독재자와 같은 행동을 하였다. 김경래, 탁명환 공저,「이것이 박태선 전도관이다」(신흥종교연구소), 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