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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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백문의 이스라엘 수도원
1. 서론
한국교회에 형성된 신비주의의 모습은 1950년대 분단과 전쟁의 위기 상황을 겪으며 더 정교한 메시지와 짜임새있는 조직을 갖춘다. 특별히 초원 김백문과 그가 운영한 이스라엘 수도원은, 1930년대 초, 중반 무렵 세력을 형성한 백남주, 김성도 등의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이론화, 체계화하였고, 해방 후에는 문선명, 박태선과 관련한 교단, 종교운동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김백문과 이스라엘 수도원은 신비주의의 이론적 구심점이자, 신흥종파의 원심점이기도 하지만 그 연구가 미진하다. 또 단체로서의 역사가 60여년을 넘었으면서도 몇 권의 단행본 밖에 출판되지 않았다. 신임철『40년 신앙의 길』, 신현식『자서전-기독교근본원리 신학 입문』『재림의 그리스도는 꼭 이렇게 오신다』, 양재숙『같이 가자 하신 당신이기에』『보이지 않는 손길에』
최중현 교수가 이스라엘 수도원 생존자들의 구술자료를 중심으로 발굴한 글, 김백문의 저작, 이스라엘 수도원(현 영원한 복음선교원)의 홈페이지 글들을 통해 그들의 신비주의를 고찰해본다.
2. 김백문의 생애와 이스라엘 수도원의 역사
김백문은 경북 칠곡에서 1917년 10월 19일 김광조와 문아지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백문이 어떤 초.중등 교육을 거쳤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가 후일에 집필한 세 권의 책을 보건대 상당한 한문교육을 받지 않았나 짐작된다. 신현식과 박영관은 김백문이 대구의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에 자퇴했다고 하고 있으나, 김백문이 김남조와 만난 것이 1934년이고 그 때부터 세상과 담을 쌓았다고 볼 때, 만 17세에 의전 3학년 중퇴라는 사실은 의심된다.
1934년 17세 때, 김백문은 함경북도 회령에서 일하던 형, 김이문을 방문했다가 김남조라는 여인을 만난다. 김남조는 당시 그 일대를 휩쓸었던 황국주 일행과 교분이 있던 기도꾼이자 신령파였고, 그녀는 종교에 관심이 없던 김백문을 신앙길로 이끈다. 김남조는 1953년에 부산에서 타계하였는데, 김백문은 그 이듬해 3월2일에 출판된 『聖神神學』에 김남조를 위한 헌사를 싣고 있다. ‘삼가 눈물과 피로 이스라엘에 잃음을 받기 도와 이강산 제단우에 제물로 사라지신 어머니 령앞에 이책을 드리나이다.’
이런 인연으로 김백문은 회령, 청진, 주을, 나남 등지의 신령파와 교분을 갖게 되고, 원산신학산에서 백남주를 소개받아 그의 제자 겸 총무격으로 따라 다니게 된다. 백남주가 예수교회에서 축출되어 김성도의 새주파를 찾아갈때도 함께 했다. 김백문은 새주파의 성주교 창립행사에서 18세 나이에 사회를 맡고, 허일웅의 미출간 원고에 있는 김백문의 진술. 최중현, 『한국메시아 운동사 연구』서울: 생각하는 백성, 1999,
이 신흥교단 강단에 서기도 했다. 그리고 1937년 어느날 하늘에서 울려오는 풍악소리를 들으며 “주께서 나타나서 나를 이끌고 내가 할 사명과 앞날의 역사와 기독교의 난문제들을 가르쳐 주시는” 신비체험을 한다. 1979년 3월 2일 “개천절” 33주년 기념예배 석상에서의 김백문의 설교를 녹음한 테이프, 최중현, 『한국메시아 운동사 연구』서울: 생각하는 백성, 1999, 부록 318
이러던 중에 김백문은 성주교를 포함하는 신령파 집단이 만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시들어버리는 것을 보고, 신령한 역사들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1940년 4월 서울에서 개원한 ‘조선신학원’에 입학하지만, 신사참배 문제로 조선신학원의 학생, 교수들이 구속되자, 김백문은 1943년 7월경 경기도 파주군 섭절리라는 곳으로 간다. 섭절리로 들어간 김백문을 따라, 그의 직계가족과 신앙의 모친인 김남조와 그 두 아들 등 연줄이 닿은 신앙동지들이 김백문의 거처에 출입하면서, 드디어 1944년 6월 2일, ‘야소교 이스라엘 수도원’이 시작되었다. 20여명의 제1기 수도생 입수식이 거행되었고, 이후 수십명 정도의 집회도 있었다. 그리고 해방 직후에는 서울 일원의 추종자들을 위해 상도동에 또 하나의 집회소를 두어 정기적인 집회를 가졌으며, 여기에 잠시 관계하던 자가 문선명이었다. 최중현, 『한국메시아 운동사 연구』서울: 생각하는 백성, 1999,
1946년 3월 2일은 김백문과 이스라엘 수도원에게 중대한 날이다. 그들은 매년 3월 2일을 ‘개천의 날’로 기념하는데 내용은 후에 살펴보기로 하고, 그 날의 회고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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