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토의 Cenci 레포트

 1  아르토의 Cenci 레포트-1
 2  아르토의 Cenci 레포트-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아르토의 Cenci 레포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아르토의 ‘Cenci 家’
‘첸치’는 아르토가 스탕달의 단편과 셸리의 희곡을 조합하여 개작한 작품으로 기독교 문명에 대한 거부와 원초적 세계로 회귀하고픈 어두운 욕망을 그리고 있다.
‘첸치’는 4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극 이야기의 배경은 15세기 이탈리아이다. 성주인 첸치 백작은 교황청의 지나친 간섭과 독선, 가족들 사이의 불신, 성 안의 음모에 충격을 받고, 스스로 내면의 검은 힘, 즉 잔혹에 자신을 내맡기게 된다. 그는 로마 교황청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폭정을 시작하며 이에 불만을 품은 두 아들을 죽이고 만다. 첸치는 점점 자연의 어두운 힘에 휘말려 광기에 빠지며 마침내 딸 베아트리체를 강간하기에 이른다. 베아트리체는 그러한 아버지 첸치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품고, 의붓어머니인 뤼크레시아도 이에 동참한다. 한편 성 안에서는 잔혹한 폭정과 패륜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첸치 백작을 제거하려는 반란군이 결성되고, 로마 교회도 이를 은밀하게 조장하고 후원한다. 그러나 첸치는 반란군이 아닌 딸 베아트리체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당하고, 베아트리체와 뤼크레시아는 교회에 의해 각각 친부 살해죄, 존속 살해죄로 처형된다. 그렇게 파괴된 첸치 일가는 어린 아들 베르나르도를 제외하고는 죽음에 의해 ‘하나’가 되고 비존재가 됨으로써 더 이상 남녀의 성의 대립도, 선과 악, 혹은 어떠한 관념적 대립도 존재할 수 없는 원형의 세계로 환원하게 된다.
‘첸치’는 일체의 윤리적 규범, 문화의 속박, 사회 제도를 거부하는 연극이다. 아르토는 일부 초현실주의자들처럼 “가족도, 어떠한 족보도, 종족도, 사회 계급도 부정”했다. 그는 ”오직 개인의 열광에 의해 신들에게 접근할 수 있고, 짐승들과 뒤섞이는 방법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신들, 짐승들은 원초적 세계를 상징한다. 그는 문화가 인위적으로 인간을 자연과 떼어놓았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는 야성의 자연에 대한 향수, 잃어버린 원시 세계에 대한 동경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세계는 모체에서 분리되기 이전의 태아 상태, 남녀의 성으로 갈라지기 이전의 암수한몸의 상태, 다시 말해 원초적인 ‘하나’의 세계이다.
연극에서 첸치는 줄곧 딸 베아트리체에게 자신의 갈증을 호소한다. 그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자행하고, 고삐 풀린 광기에 야수처럼 몸과 마음을 내맡긴 첸치가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생명에 대한 목마름과 같은 것이다. 여성, 특히 모체는 물의 상징이며, 생명의 근원이다. 그런데 첸치는 왜 굳이 딸에게서 갈증을 풀고자 하는 것일까. 그것은 딸-자식이란 시간의 차원에서는 미래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딸과의 근친상간은 문화 세계에서 원시 세계로의 퇴행이면서 동시에 미래와의 융합, 즉 파멸을 통한 새로운 생명으로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베아트리체는 생명의 끈이 된다. 첸치를 살해한 그녀를 체포하기 위해 군인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히자 베아트리체가 마지막으로 달려가 어린 남동생 베르나르도를 끌어안고 입맞추는 행위는 첸치 일가의 ‘핏줄 잇기’의 상징이다. 그때 베르나르도는 베아트리체를 자신의 ‘영혼’이라고 외치고,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의붓어머니 뤼크레시아는 문득 베르나르도에게서 첸치의 현존을 느끼며 소리친다. “맙소사! 아니 첸치 아냐!”(4막2장)
우주의 심연에서 끓고 있는 어둡고 잔혹한 힘의 하수인이 된 첸치는 우선 친자 살해로 자신의 지체를 절단하는 작업을 시작하고, 이어 딸과의 근친상간으로 ‘나와 나의 분신’이라는 이중성을 단일체로 환원시키며, 마침내 딸의 친부 살해를 통하여 불결한 육체를 파괴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우주의 잔혹은 단지 파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준비 작업이고 그래서 더욱 가혹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장 주네가 지적했던 것처럼, 생명의 태어남이 모체를 파괴하는 폭력을 통한 창조이듯이! 이러한 파괴-창조를 표현하기 위해 아르토는 불의 이미지를 등장시킨다. 왜냐하면 불은 존재하는 모든 기존 질서를 가차없이 파괴하고 과거의 잿더미 속에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을 소생시키는 힘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첸치는 마치 ‘불의 몽상’에 사로잡힌 인물과도 같다. 그렇게 엄청난 세척 작업을 거쳐 소생할 새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베르나르도이다. 그는 베아트리체와의 뜨거운 입맞춤을 통해 첸치 가문의 생명의 불씨를 이어받게 된다. 이제 그 무서운 카오스에서 하나의 코스모스가 형성된 것이다. 첸치 일가는 죽음에 의해 어두운 힘에서 풀려나고자 했다. 그런데 막이 내리기 직전, 죽어가는 베아트리체는 무서운 예감에 전율한다.
베아트리체 : 저 세상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어? 그 생각을 하면 이 죽음 자체가 처절한 생각이 들어. 결국 죽음은 내가 아버지와 닮았 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게 될까봐 겁이 나. (4막 3장)
결국 그렇다. 첸치 일가가 ‘하나’로 모아진 지점. 그것은 검은 힘의 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검은 힘은 어둠의 세계(혹은 무의식의 세계) 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고 있다가 어느 날 다시 베르나르도를 통해서 분출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생명의 윤회를 믿는 다면, 마찬가지로 어둠, 즉 죽음의 힘도 끊임없이 윤회할 터이니까. 원초적 세계, 그것은 우리 내면의 깊은 곳에 누워 있는 생명의 또 다른 뿌리일 것이다. 아르토의 ‘첸치’는 그런 점에서 초현실을 바로 현실 안에서 폭로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르토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이 당면한 문제는 새로운 감각의 발견이다. 그것은 카오스의 의미 작용이고, 또 하나의 질서이다. 그 감각만이 논리의 높은 벽을 허물고 현상계 너머의 세계, 인식 이전의 세계의 신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초현실주의자들이 무의식의 세계에 주로 관심을 모았던 것에 비해 아르토는 더 깊은 존재의 뿌리, 우주의 심연으로 내려가려는 엄청난 모험을 감행했던 인물이다. 따라서 ‘첸치’는 원시 신화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선과 악이 개념적으로 뚜렷하게 구별되어 있고, 죄와 벌이 인과율을 따르는 기독교 세계와는 다르게 ‘첸치’의 세계는 선과 악, 죄와 벌이 혼합된 하나의 덩어리이며 생명과 죽음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원형이다. 따라서 연극 공간은 잔혹과 열광이 한데 녹아내리는 용광로와 같은 것이 되고, 관객은 더 이상 평온한 관람자가 될 수 없으며, 그 고통과 잔혹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열광에 빠지게 될 것이다. 마치 원시 제의에서 신자들이 그러했듯이. 그러나 당시의 관객들은 원시인이 아니고 현대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힘겨운 관극을 견뎌내지 못했고, ‘첸치’는 공연에서 참패했다. 또 다른 면에서 볼 때, 근친상간은 가족 제도의 파기이므로 ‘첸치’는 사회 제도에 대한 전면적 도전이자 문화(특히 기독교 문명)에 대한 거역이다. 폭력과 근친상간을 조종하는 검은 힘들과 야만적 열광, 그에 의한 의식의 세척과 새로운 태어남, 이러한 ‘첸치’의 연극 세계를 가리켜 앙리 구이에는 반기독교적, 원초적 신화의 세계라고 평하기도 한다.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 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