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천주교 허용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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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일본 정부의 천주교 허용 역사
1. 머리말
1549년 천주교가 유입된 이후 19세기 말까지 일본 교회사는 용납과 허용보다는 박해가 대부분의 기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중국과 한국도 긴 박해를 경험하였지만, 선교사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계획적이고도 장기적으로 진행된 예는 드물었다. ‘후미에’(踏畵)를 통해 개인의 은밀한 양심까지도 지속적으로 정부의 예속 하에 두려고 했던 일본 정부의 두려움은 무엇이었는지, 왜 이런 두려움이 계속 계승되었는지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과장된 두려움이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재미있는 사례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런 정부의 반기독교 정책도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양 국가들의 영향 때문에 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인정 여부를 일본 정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본 발제에서는 외부로부터 가해진 서구의 충격, 즉 페리(Matthew C. Pey)제독의 개항 압력 이후 일본 정부가 어떻게 선교의 자유를 허용하는지 시기별로 살펴보려 한다. 페리제독이 일본의 문을 두드린 1853년부터 신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된 1899년, 약 반세기에 걸친 역사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천주교 허용 역사를 통해 어떤 역사적 교훈을 읽을 수 있는지 나름대로 제시해 보았다.
2. 외부의 충격으로 천주교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다.
밖으로부터의 충격에 의해 이 시기 일본과 일본 천주교에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당시 일본 천주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 변화를 이끌어 낼만 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 충격은 뒤늦게 해외 진출에 뛰어든 미국으로부터 가해진 것이었다. 오늘날 긴밀한 美日關係를 생각할 때, 의미 있는 첫 단추는 사실 이 때 끼어진 것이다.
1853년 페리 제독은 일본 막부에 開國을 하지 않으면 무력까지 불사하겠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사채업자가 내일 다시 찾아온다는 두려움 속에 일본 막부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각 계의 의견은 분분했지만 뾰족한 묘수는 누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양 제국주의의 충격 앞에 선 일본은 자신이 어린아이처럼 약하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는 서양 제국주의의 먹잇감이 되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 維新派의 생각이었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에게 만만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집을 불리고 체질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메이지 유신을 이끌었던 유신파는 집중적인 트레이닝과 스트로이제를 통해 단기간에 단단한 몸을 만들려고 하였다. 이후 일본은 집중적으로 서양을 연구하고, 서양화의 길로 나가기 시작한다. 이것이 일본 앞바다에 나타난 새로운 강자인 미국을 대하는 일본의 반응이었다. 이처럼 일본의 국가 정책에 가장 결정적인 변수로 등장한 것이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동양진출이었던 것이다. 이는 동아시아 전체에 가해진 충격으로서 중국은 1840년 아편전쟁으로 인해, 벌써 넉아웃되어 있었다. 한국도 서양의 충격 앞에 노출되었지만, 이들 두 나라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비켜가 있었다. 그러나 1876년 페리제독의 방식과 똑 같이 일본에게 당하고 만다.
메이지 유신은 서양의 겉모습 따라 하기에 치중한 나머지 진정한 정신적인 변화까지는 수반되지 못했다. 사실 그럴 여유도, 경험도 있을 수 없었다. 최고 정치 리더들은 일본을 이끌고 갈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고대의 天皇制에서 찾았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역사를 뒤로 돌리는 것이었다. 메이지 유신의 방향 자체가 부유한 나라 건설이 아니라 강한 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국민의 권리는 그 만큼 제약되었다. 왜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종교의 자유에 대해 그리 인색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3. 1858년 외국인의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다.
일본을 비롯한 동양 삼국의 초기 선교에 예수회가 미친 영향은 결정적이었다. 자발적으로 발생했다고 평가되는 조선의 천주교회조차 예수회 신부들이 쓴 책에 의해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수회는 일본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된 박해에 출구를 찾지 못했으며, 중국 전례논쟁의 후유증으로 결국 1773년 해산되고 만다. 개국 이후 수면으로 떠오른 ‘잠복 기리시탄’의 가톨릭 회귀를 위해 노력하며, 일본 현대 가톨릭교회의 기초를 구축한 것은 파리외방전교회였다. 일본 선교는 1843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맡겨졌던 것이다. 1859년 9월 프랑스 총영사가 일본에 부임할 때 그간 류큐에서 선교에 종사한 적이 있었던 파리 외방전교회의 지라드(Girad) 신부가 통역으로 동행, 입국하였다. 그는 1862년 요코하마에 성당을 건축하고 일본어로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예수회는 1908년에야 다시 일본 땅을 밟아볼 수 있었다.
이 시기 일본 기독교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라면 ‘잠복 기리시탄’이 자신의 신앙을 사회에 드러냈다는 점이다. 1865년 나가사키 성당에 나타난 잠복 기리시탄들은 세계교회사의 감동적인 한 페이지를 장식해도 부족함이 없는 끈질긴 신앙의 생명력을 보여주었다(기리시탄의 발견, 기리시탄의 부활). 잠복 기리시탄의 존재와 더불어 일본에서 외국인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의 중요한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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