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미술 속 회화론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의 표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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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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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현대 미술 속 회화론
-추상표현주의 회화에서의 표현성
;표현할 수 없는 것의 표현, 숭고
I.주교재
J.F. Lyotard, 유정완 외역, 『포스트모던의 조건』,민음사,1992
진중권, 『현대미학 강의』, 아트북스, 2003
안성찬, 『숭고의 미학』, 유로서적, 2004
“묘사가 불가능한 것은 다른 어떤 때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 즉 무엇인가가 일어나는 순간에 존재한다. 회화는 묘사 불가능한 것이며, 회화가 증언해야하는 것은 그 사건 혹은 그 자체이다.“ _장-프랑수아 리오타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함
바넷 뉴먼의 작품은 단순하기 그지없다. 그 안에는 알아볼만한 대상도 없고, 그 이전에 어떤 형체도 없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형식요소들의 유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몇 개의 수직 혹은 수평선으로 나누어진 커다란 색면. 그게 전부다. 하얀 바탕에 파란 수직선 하나와 갈색 수직선 (「White Fire I」,1954). 아니면 파란 바탕에 하얀 줄 두 개 (「By Twos」, 1949). 그게 전부다. 워낙 충격적인 것에 익숙해진 지금의 눈으로야 그리 대단치 않게 보일지 모르나, 당시만 해도 뉴먼의 작품은 이해되지 못해Th, 그는 미술계에서 철저하게 고립을 당해야 했다.
그의 대표작은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1969~70). 여기에도 존재하는 것이라곤 오직 정사각형 모양의 빨강, 파랑, 노랑의 색면뿐이다.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 사실 그까짓 3원색의 색면을 누가 두려워할 것인가? 그런데 실재로는 그렇지가 않다. 274*603cm 크기의 이 거대한 작품 앞에서면 굳이‘두려움’이라 할 수는 없지만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관찰자가 보기에 너무 작은 것은 아름답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관찰자의 지각의 범위를 가볍게 넘어서는 이 작품은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추한 것도 아니다. 이 작품이 매개하는 체험은 ‘미’나 ‘추’라는 범주로 파악할 수 없는, 그 밖의 어떤 것이리라.
그렇다면 무엇이 이것을 작품으로 만들어 주는가? 이 물건을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 그림 앞에 선 관찰자의 체험 혹은 느낌. 바로 거기에서 이 그림은 작품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미’란 인식 대상과 인식 주관의 조화에 그 본질이 있다. 이 작품 안에서 예술가의 예술적 솜씨를 확인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이렇다할 기교도 기법도 없고, 심지어 예술가는 핀젤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채색에 사용된 것은 페인트용 롤러다. 여기서 전통적 의미의 예술은 존재하기를 그친다. 예술은 현실을 묘사하기를 포기하고, 이 침묵으로써 ‘이 세계에는 예술로써 묘사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리오타르의 말대로 대상을 묘사하기를 포기한 현대예술은“묘사할 수 없는 것을 묘사”하려는 모순적 시도인지도 모른다. 한 장의 체험 앞에서 바로 그것과 접하는 체험. 나의 인식 능력으로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그것과 마주치는 불편한 체험. 그것은 바로 ‘숭고’의 체험이다.
-미에서 숭고로
2차대전을 즈음하여 예술운동의 주도권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넘어간다. 아방가르드는 미국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아방가르드의 미학적 강령이‘전통과의 단절’이라면, 바넷뉴먼에게 단절해야 할 전통은 유럽회화에서 전통이었다. 뉴먼은 이모든 것과 단절하려 한다. 대공황과 2차대전의 경험. 그러나 서구예술은 어느새 인간의 가장 깊은 체험을 묘사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이 시대의 황폐함과 도덕적 충격을 표현하려면 무엇보다도 서유럽의 전통과 단절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유럽 미술의 전통과 단절하기 위해 그가 사용한 전략이 바로‘미’를 거부하고‘숭고’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었다. 숭고의 효과를 위해 뉴먼은 거대한 포맷을 사용하곤 했고, 또 관람자로 하여금 그 거대한 그림을 그 앞에 바짝 붙어서 바라볼 것을 주문했다.
형식적으로 보면 뉴먼의 작품은 추상에 속한다. 하지만 뉴먼의 추상은 형과 색의 유희를 추구하는 형식주의와는 관계가 없다. 그에게는‘어떻게 그릴 것인가’보다는‘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더 중요했다. 회화는 아직도 주제를 가져야 한다. 뉴먼의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사실의 형식적 추상“이 아니다. 그것의 형식적 추상성은 사유의 추상성, 즉 그것이 불러일으켜야 할 ”추상적 사유“를 위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몬드리안의 작품은 ”기하학(완성)이 형이상학(열광)을 집어삼켰다“. 뉴먼은 몬드리안처럼 형태의 기하학적 추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숭고한 감정을 실어 나르는 ”매체“, 숭고의 체험을 전해주는 ”살아있는 물건“을 만들어내려 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제“, 그가 ”추상적 사유“라 부르는 회화의 ”형이상학“이었다. 그‘주제’란 물론 ‘숭고’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는 그의 작품이 숭고의 상징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의 작품은 그리지도, 지시하지도, 상징하지도 않는다. 언어로 번역되지도, 연상을 통해 지시하지도, 암시를 통해 상징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예술적 진술, 그리하여 그저 ”현전“으로서 포착되어야 한다. 그의 회화는 바깥의 숭고를 그리지 않는다. 그저 화면 위에 숭고가 일어나게 한다. 이 사건 성 때문에 그는 자신을 추상화사보다는‘액션 패인터’에 가깝다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