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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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1 한나 아렌트 [Hanna Arendt, 1906.10.14~1975.12.4]의 소개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작가, 철학자 1906년 10월 14일 (독일) - 1975년 12월 4일
학력 하이델베르크대학 철학 박사수상1959년 레싱상
경력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교수,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교수,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교수
1963 미국 시카고대학교 교수독일 태생의 유대인 철학사상가이며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2차 세계대전 등 세계사적 사건을 두루 겪으며 전체주의에 대해 통렬히 비판했다. 사회적 악과 폭력의 본질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폭력의 세기》를 집필하였다.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등 전체주의에 대한 그녀의 분석은 탁월했다.
1.2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줄거리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등장하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은 독일의 SS중령(최종계급)으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The Final Solution)’, 즉 유대인 대량학살의 실무 책임자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아르헨티나로 도망갔던 그는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공개 재판을 받게 된다. 아이히만의 재판 소식을 들은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예정됐던 대학 강의를 모두 취소하고 잡지 ‘뉴요커’의 재정지원을 받아 특파원 자격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참관한다. 그리고 보고서 형식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뉴요커’에 연재했다.
아이히만은 체포된 지 2년 후인 1962년에 처형되었다. 재판 당시 그는 자신이 유대인을 박해한 것은 상부에서 지시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후에 예일대학교의 심리학자들은 실험을 통해 부당한 명령이라도 해도 한번 받아들이면 무비판적으로 그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게 된다는 연구 결과를 얻었다.
검찰 측 기소문은 아이히만을 “거의 전적으로 유대인 문제에 관여한 사람,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을 파멸시키는 것이었던 사람, 이 사악한 정권(나치)이 확립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할이 유대인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오직 한 사람”으로 강조했다. 세계 언론도 ‘인간의 얼굴을 한 악마’를 보기 위해 취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그 열기는 2주 만에 식어버렸다.
분명 정신이상자이거나 성격파탄자여야 했을 아이히만은 너무도 멀쩡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치 친위대 장교이면서도 유대인 여자를 정부로 둘 정도로 반유대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는 나치의 정강도 몰랐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으며 친구의 권유에 등 떠밀려 친위대에 들어갔을 뿐이었다.
여기서 ‘양심’의 문제가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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