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군기지 민군복합 형관 광미 항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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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해군기지 민군복합 형관 광미 항의 미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역사적으로 변방이 되었던 제주 땅에는 2012년 6월- 시대의 발전과 더불어 나라의 안보 및 경제적 번영과 고유의 청정 환경 및 평화와 쉼이 서로의 자존을 건 쟁투의 장소로 전락해가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제주해군기지 공사현장이다.
2012년 4월 20일(금) 속개한 제주특별자치도의회 293회 임시회 제4회 본회의 도정 질문 답변을 2통해 우근민 제주특별자치도지사의 제주 해군기지(민군복합형 관광미항)에 대한 입장 내용을 접하게 되었다. 제주해군기지가 단순한 군사기지인지 아니면 진정한 민군복합항인지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항만 관제권’ 문제가 국토해양부와 국방부, 제주특별자치도간 3자회담을 통해 최종적으로 결론이 날 전망임을 밝힌 기사가 ‘제주일보’ 2012. 4. 21, 제2면에 게재되었다. 이 기사를 접하면서 곧 해군기지의 문제가 일단락 매듭지어 지겠구나 생각하면서도 아무래도 근본적인 해결 방책은 아니라고 본다. 그동안 이를 둘러싼 여러 보도나 연두 기획의 내용을 보더라도 임시방편적 타협으로, 혹은 정부의 권위의 형태(국가정책)로 매듭지어지면 두고두고 분란의 온상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제주일보 2012년 6월 11일(월) 제1면에는- 道, 시뮬레이션 검증 오락가락 -정부 재현 불참-자체 검증 추진- 정부에 검증 재 요구에 대한 기사가 있더니, 같은 신문 6월 15일(금) 제3면에는 서귀포경찰서는 14일 공사 차량 통행을 방해한(해군기지 공사 방해) 2명을 붙잡아 조사 중이라고 한다. 같은 신문 6월 19일(화) 제13면에 강창일 국회의원(민주통합당 제주시 갑)의 인터뷰 내용 중 ‘제주해군기지 현안은 어떻게 풀 것인가?’ 에서 “문제를 풀기 위해선 19대 국회 내에 제주해군기지 특위를 구성하고 왜 문제가 생겼는지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제주에서 공사가 진행되는 ‘민군복합형 관광미항 -해군기지’는 아무래도 문제를 제기하는 내용들을 해결하지 않고는 국가권력에 대한 불신으로 남아 국민통합 및 발전에 지대한 암초로 남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한다.
도민의 한 사람으로서 제주도의 미래를 생각할 때 옛 어른들의 이야기 속에 자리한 일본군의 이야기, 혹은 4·3의 이야기들이 떠오르게 된다. 변방의 섬으로 희생양이 되는 지정학적 취약점을 또 재연되지 않으려나 염려가 되어진다. 이런 생각으로 역사적 배경과 지인들의 견해를 배우는 마음으로 그 자료를 대략적으로 정리하는데 있다.
1.해군기지 설치 반대의 도민들의 정서
1)수난의 역사적 경험들 때문이다.
(1) 일제 말기 제주도에 주둔했던 일본군의 전투기지화의 역사 조성윤, 『고난의 섬에서 평화의 섬으로』, 역사비평 82호 봄호. 역사비평사, 2008. 189-192쪽
1944년 말 일본군은 ‘결호작전(決號作戰)’이라는 일본 본토 방어 작전을 수립했다. 이 작전에서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격해올 수 있는 두 가지 진격로를 예상했다. 하나는 북해도를 통해 들어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남쪽으로 진격해올 경우 대만에서 오키나와를 거쳐 큐슈 남부로 들어오거나, 제주도를 거쳐 큐슈 북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실제로 미군은 남쪽을 택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를 차례로 공격한 것이다. 이오지마에 미군이 상륙한 것은 1945년 2월 15일이었다. 3월 25일 이오지마가 함락되면서 일본군과 미군의 공방전이 시작되어, 6월 말까지 전투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5만여명 일본군과 오키나와 주민 12만 명 이상이 죽음을 당했다.
다음은 제주도였다. 제주도는 ‘결7호작전(決7號作戰)’에 해당하는 지역이였다. 이 작전에 따라 일본군은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 제주도에 7만 5천여 명의 일본군이 들어와 미군 상륙을 대비하면서 전투를 준비하였다. 이를 위해 제주도 방어를 전담하는 제58군이 창설되고 그 밑에 관동군 111사단과 121사단이 투입되어, 신설된 제96사단과 독립 혼성 제108여단이 합류했다. 이들은 제주 전역에 배치되어 미군 상륙에 대비하였다. 이들은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섬 전체를 요새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도민들을 동원해서 비행장 4개소, 해안 특공기지 6개소, 그리고 산악지역에 수백 개의 지하호를 만들어 놓았다. 제주도에는 일제 말기 일본군이 조성해 놓은 군사 시설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비행장, 포대, 참호, 훈련장 및 초소, 대피소, 비행기 격납고, 탄약고, 폭탄 매립지 등 군사시설) 이 과정에서 당시 수만 명의 제주도민들은 강제 동원되어 비행장을 닦고 굴을 팠으며, 심한 공출에 시달렸다.
(2)4·3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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