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의 준수 그 이상 미국 예술교육의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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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규범의 준수 그 이상 미국 예술교육의 주소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데니 팔머 울프는 하버드 교육대학원 수석연구원이며, 국립 대안 학습 및 평가 센터의 이사이다. 울프 박사는 어린이의 언어능력 평가 형식을 확대하고 더 신뢰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기 위해 구성된 언어개발 프로젝트의 연구 위원장이다. 또, 예술 및 인문의 수행평가 방법의 개발 목적으로 구성된 혁신적, 5개년 프로젝트, ARTS PROPEL의 이사를 역임해 왔다. 울프 박사는 고등학교 수업의 사상을 평가하는 방법을 소개한 대학위원회 연속출판물의 편집자이며, 다 수의 학술 논술, 논문, 저서의 저자이기도 하다. 예술의 학술적 준비; 문학의 재고찰; 고등학교 교양 및 문학; 완전한 수단; 예술의 학습 및 평가; 생각의 실천; 학습, 수업, 평가, 생각하는 습관의 재구성; 생각의 행위 등이 있다.
메리 버거는 하버드 교육대학원의 보조 연구원으로,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연구하기 위해 영국, 네델란드, 서독, 유고슬라비아의 여성 정기간행물을 조사해 왔다. 이 장은 록펠러 재단의 기부와 전문지식을 기꺼이 공유한 동료들, 낸시 스미스, 스티브 시델, 케이트 윌슨, 코니 울프, 톰 울프의 도움으로 완성할 수 있었다. 마지막 권장 사항은 1990년 7월 미 국립예술기금에 제출한 레포트에서 인용한 것이다.
서론
1990년 가을, 신시네티에 모인 여덟 명의 배심원들은 예술과 외설의 문제를 비로소 접한 후에야 그 경계선을 결정하였다. 이들 대부분이 고심한 문제는 헌법 수정 제1항에 명시된 예술가의 권리, 미 국립예술기금의 존속 여부, 포르노에 대한 지역사회의 인식, 그리고 미국이 살아있는 문화가 아닌, 정통, 공식 예술만을 지지하는 국가가 될 것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공판의 초기 단계, 특히 배심원을 선정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가 있었다:
50명의 배심원 후보 중에서 여덟 명의 배심원과 한 두 명의 대리인을 선정하는 일이 있었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 중 예술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독실한 신도였으며, 포르노와 동성애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검찰이 여덟 명의 남녀 배심원을 심문하였지만, 그 중 단 세 명만이 예술 박물관에 가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나머지는 다른 종류의 박물관에는 방문한 경험이 있지만, 그것도 학교 견학 정도였다고 했다. 박물관에 가본 경험이 전혀 없다고 말한 한 50대 남성은 예술이나 예술 애호가마저도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심문 도중, 이 남성은 변호사, 마크 D. 메지보브에게 “그런 일에나 관심있는 사람들입니다.”라고 말하며 “우리와는 다른 부류입니다. 저는 예술작품을 모릅니다.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 답변이 의미하는 것은 미국의 예술교육이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의 교육체계는 예술에 대한 지식이나 관심을 가진 일반인을 위한 대중예술교육의 주 통로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신시네티 검찰관들이 수 많은 학교에서 강요에 의해 박물관 견학을 간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 이들은 직접 예술작품을 만들거나, 수집하거나, 박물관에 가는 사람들, 예술을 보고가 아닌 발명으로 이해하는 사람들, 일곱 장의 외설적 사진을 더 큰 작품 세계의 한 부분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전시를 하는 이유는 판매가 아니라 반응을 구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 (고야, 트윌라 타프, 신시아 오지크 등)이 법정에 참석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이렇게 위험한 미국인은 기껏해야 오십 명 중 세 명뿐이라는 통계에 안도할 수 있었다.
과거에도 학교에서 예술교육이 차지하는 역할은 매우 작았으며, 이것은 현재로 이어져 관습화되었고, 결국 사회로 파급되고 있다. 19세기 중반 종합중등학교에 처음 도입된 이후, 예술교육이 존속할 수 있었던 조건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회규범을 따르고, 산업과 관련된 기술을 교육하거나, 특허청에서 특히 높게 평가하는 창작품과 창작성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불문율은 실제 존재했다 -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학교 과목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이십년 동안 과학, 심리학, 인문학 분야에서 심상, 표현, 또는 가능하거나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능력을 존중하는 인류인식의 시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인류능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은 다양한 통찰력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예술이 단순한 공예나 상상력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식 및 업무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조사 작업에 스케치북을 이용하는 것, 반전 필름과 크랙 글레이즈의 정밀 실험, 리허설과 포트폴리오의 준비를 엄격히 평가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이것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형식의 예술교육이 등장하고 있다. 직업훈련이나 도덕교육 대신 새롭게 등장한 이 형식은 성인 예술가 및 관객이 추구하는 도전적 생각과 엄격한 실천의 본질적 바탕이다.
달리 표현하면, 현재로서는 적어도 예술교육이 활성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예술교육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여러 어려움을 수반한다. 학생들이 예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균형,” “조화,” “디자인,” “아름다움” 이상의 소재를 다루게 된다. 이에 따라, 서양예술의 헤게모니와, 성별, 신체 이미지와 같은 기준, 더 나아가 인종, 주변문화,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대두할 것이다. 더구나, 예술교육이 심각해 진다면 적정 몫 이상을 요구하게 된다: 예술 과목을 전임할 정교사를 고용하는 것, 40분 수업 대신 스튜디오 수준의 수업을 진행하는 것, 콘서트장, 박물관, 길거리 등, 대중예술 관람을 통한 예술교육이 그 예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예술교육은 다른 교육분야의 현 상태에 대한 논쟁을 일으키며, 문제를 부과하는 대신 문제를 발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하고, 하루 단위의 과제 대신 장기간의 프로젝트를 요구하고, 학습목표에 따라 정해진 시험 대신 포트폴리오와 공연을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산업 교육과의 연계를 강요 받아온 사실이나 그렇게 이해되도록 당연시 된 것과 같이 예술교육을 과거의 속박적 역사에 구속하는 관습을 인정하고 이것을 포기하지 않는 한, 예술교육이 이와 같이 활성화된다는 것은 - 그에 따른 위험을 포함하여 - 기대하기 어렵다. 또한, 예술과목이 현재 교육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재정지원을 향상시키지 않는 한, 예술교육은 규범을 넘지 않는 과목으로서만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 오랫동안 시민 오십 명 중 시각예술이 잡지의 삽화와 다르지 않다는 것, 전시회를 판매와는 별개라고 인식하는 사람은 단 세 명뿐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