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국자감과 사학 12 공도 박찬수 논문 비평

 1  고려의 국자감과 사학 12 공도 박찬수 논문 비평-1
 2  고려의 국자감과 사학 12 공도 박찬수 논문 비평-2
 3  고려의 국자감과 사학 12 공도 박찬수 논문 비평-3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고려의 국자감과 사학 12 공도 박찬수 논문 비평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려의 교육제도는 크게 국자감 이전의 교육제도와 이후의 관학과 사학교육으로 나눌 수 있다. 개설서적인 측면에서 국자감 이전에 나타나는 교육제도로 ‘유경습업’과 ‘권학관’제도를 들 수 있고, 국자감 이후의 교육제도로서 국자감, 향교, 12공도, 서당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국자감의 설립 시점을 언제로 보아야 하는지에 관한 논의 이후에 가능하겠지만, 현재까지는 위와 같이 일반적으로 구분하고 있다.
조선시대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논의가 적은 서당을 제쳐두고, 고려의 교육제도상 많은 논의가 있어 온 것이 국자감, 과거제도, 사학이다. 따라서 논문의 제목만으로 볼 때, 이 논문은 고려의 교육제도에서 비중이 큰 국자감과 사학 12도의 내용이다. 연구자뿐만 아니라 한국교육사에서 고려시대 교육제도를 이해하는 데, 이 논문은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
2. 논문의 요지
이 논문은 기존 학설을 바탕으로 그 논증과정을 검토한 후 고려시대의 교육체계에 관한 이해를 높이고자 다음과 같은 연구 문제를 설정했다.
1. 고려 초의 중앙교육기관과 국자감 설치 문제. 2, 예종 대 설립된 7재의 성격과 기존 국자감과의 관계. 3. 학식에 규정된 유학삼학부의 문제. 4. 십이공도의 시대적 변천.
연구 문제를 위와 같이 설정한 것은 기존의 학설을 반박하기 위함일 것이다. 기존 연구 성과를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는 추정은 논문 제목을 통해 알 수 있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나열한다는 것은 연구의 의미가 제한되기 때문이다. 연구자가 기존 학설에 대하여 위와 같은 연구 문제에 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고려 초 중앙교육기관과 국자감의 설치 문제.
고려시대 중앙교육기관에 관한 통설은 건국 초기부터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이 존속되어 오다가 성종 대(992년)에 국자감으로 개편되어 발전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태조 13년 서경에 학교를 설치했다는 근거를 통해 그 이전에 수도인 개경에 학교가 있지 않았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연구자는 개경 학교 설치와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증거로 위와 같은 통설을 부정한다. 연구자가 주목하는 것은 성종 2년에 12목에 수령을 파견하고, 지방통제를 강화한 부분이다. 이어 성종 4년말에서 5년 초 전국에 취학조서를 내려 260명의 지방학생을 상경예업 시킴으로써 중앙교육기관을 창설하니 이것이 국자감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즉, 유경습업을 국자감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이어 서울에 남은 자가 국자감의 모체가 되고, 지방으로 귀향한 학생이 향교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둘째, 예종 대 설립된 7재의 성격과 기존 국자감과의 관계.
7재의 성격에 관한 연구는 일관되지 않고 있다. 종래에 7재의 성격에 대하여 국자감이 개편된 것이라는 인식이었는데, 허흥식은 국자감보다 우위에 있던 학재라고 주장하고, 신천식은 국자감 외에 유경을 전공하는 별도의 새로운 교육체제라고 주장한다. 연구자는 국자감의 최고학부가 7재라고 주장한다. 즉, 국자감의 일반학생과 그 위의 상사 즉 7재생의 2단계를 주장한다. 이러한 7재의 의의는 문종 대 이래 사학의 발달로 부진한 중앙 관학이 제 자리를 찾게 된 점, 무학이 설치되었던 점, 그리고 고려 멸망 때까지 국자감의 기본 골격을 계승했던 점을 찾는다.
셋째, 학식에 규정된 유학삼학부 문제
인종대 식목도감에 상정되어 고려의 교육제도 인식의 기준이 된 학식은 입학자 신분, 학생수, 입학 불허 조건, 유학부와 기술학과, 주현학생의 자격, 교수 및 교육방법, 교과과정과 수학연한 등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국자감에는 국자학, 태학, 사문학이 존재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연구자는 학생 정원수와 3학부의 문제를 들어 학식을 반박했다. 결국, 인종 대 학식은 교육목표를 설정하기 위해 당제를 모방한 교육체계를 세운 것이지, 실제 운용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