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성의 의식 구조와 문화로 본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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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여성의 의식 구조와 문화로 본 정체성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70년대 보수적인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가족법 개정운동의 이면에서 각 분야의 일회적인 사건에 대응하면서 조직과 투쟁에서 맹아를 형성해왔던 진보적 여성운동은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념, 조직, 실천면에서 1970년대와는 다른 질적인 발전을 이루어냈다. 여성운동의 질적인 성장은 1960년대 이후 진보적 사회의식을 가진 지식인 여성들이 배출되고,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과 크리스찬아카데미 여성교육 등을 통해 새로운 주체들이 형성되면서 가능했다. 무엇보다 매 시기마다 개인 앞에 닥친 모순과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선도적으로 나섰던 용기 있는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1983년 여성공무원 조기정년퇴직의 부당함을 법적으로 처음 제기한 김영희, 25세 조기정년퇴직문제를 제기한 이경숙, 부천경찰서 성고문을 폭로한 권인숙 등의 용기는 여성운동을, 때로는 민주화운동 전체의 진전을 이끌었다.
1980년 여성신학자협의회가 창립되었다. 1983년에는 유화국면을 맞아 사회변혁운동의 관점에서 지식인 여성을 중심으로 여성평우회(여평), 여성의전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여성부, 또하나의 문화(또문), 기독교여성민우회(기독여민회) 등이 조직되었다.
“여성의 진보 없이 사회변혁은 불가능하다.” 여성운동의 새 장을 연 여성평우회의 창립은 계급문제와 민주화라는 과제에 가려져 있던 여성문제를 사회변혁의 주요 화두로 던졌다. 여평은 가부장적 성차별 문화의 개혁, 남녀 모두의 인간다운 삶을 위한 사회건설, 민주통일사회 건설 등을 창립 목적으로 삼았다. 여평의 창립은 분단극복, 민주화 등 우리 사회의 민주적 발전과 여성해방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하고자 하는 새로운 여성운동의 출발을 알렸다. 이는 그동안 정권의 들러리로 전락하여 여성문제와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에 접근하지 못했던 기존의 보수적 여성운동에 대한 내적 반성과 비판의 결과이기도 했다.
여평은 가정폭력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하고, 25세 여성조기정년제 철폐운동에 성공하면서 대중들에게 그 존재를 뚜렷이 각인시켰다. 여평은 초기 남녀를 차별하는 성차별 문화 개혁을 목표로 삼고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1984년 10월 서울과 12월 부산에서 ‘여성문화 큰 잔치: 일하는 여성’대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그리고 해체되기까지 4년 동안 가정폭력 문제도 꾸준히 제기하였다.
또문은 여평 등 진보적 여성운동과 또 다른 차별성을 갖고 출발하는데 주로 소집단활동으로 가부장적 권위주의, 획일주의, 성차별의 고정관념을 극복하고 남녀평등 지향적 대안문화 만들기에 전력했다. 또문은 1985년 1회 여성대회 이후 전체 사회운동 진영의 부문운동이 아닌 여성운동으로서의 독자성을 주장하며 진보적 여성운동단체들과 다른 길을 걸어갔다. 이에 비해 민청련 여성부는 한국 여성들이 겪고 있는 억압적 상황의 본질은 같은 계층 남성들이 받는 경제적 억압과 더불어 성차별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받는 데 있다며 기층 민중의 여성운동 지원을 과제로 정했다. 민청련 여성부는 여성 노동자의 인권, 기생관광 반대운동, 여대생 추행사건 등 첨예한 여성문제를 정치문제로 만들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단체들은 1984년 11월 시위 중 연행된 경희대 여학생들이 경찰서에서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자 12월 여대생성추행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공동 대응에 나섰다. 진보적 여성단체들의 연대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이들은 톰보이 부당해고 반대 불매운동, 결혼퇴직제 반대운동, 여성조기정년제 반대운동, 금융권의 여행원제 폐지운동 등의 활동을 펼치면서 여성운동의 지평을 넓혀 나갔다.
다른 한편 1984년 중반부터 제조업과 사무직 여성 노동자 등 기층 여성들의 생존권 투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 진보적인 여성운동 진영에서는 1985년 제1회 여성대회를 개최하여 각계 기층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 투쟁을 결집했고, 이를 통해 여전히 민주화운동과 거리를 두고 있던 또문이나 주부아카데미협의회 등과 광범위한 연대를 이루어 ‘민족, 민주, 민중과 함께하는 1985년 여성운동선언’을 이끌어냈다. 1986년 2회 여성대회에서는 한 단계 더 진전해 진보적 지식인 중심의 여성운동이 기층여성을 운동의 주체로 주목하기 시작하여 뱅뱅노조탄압저지투쟁 등 기층여성운동 지원을 위한 연대틀로 여성단체연합 여성생존권대책위원회(생대위)를 발족시켰다.
1987년 6월항쟁 전후에 전개된 KBS 시청료납부 거부운동, 부천서 성고문 규탄투쟁, 최루탄추방운동은 반독재민주화라는 한국사회 공통의 과제를 여성운동과 결부시킨 투쟁이었다. KBS시청료 납부거부운동은 1986년 KBS 시청료납부 거부 여성연합을 결성하여 진행하였는데, 주부 등 여성을 대상으로 국민운동을 펼쳐 전 국민의 52% 참여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여성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 전체적으로도 당시 이와 같은 대중적 참여는 꿈꾸기 어려웠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2월 9일에는 KBS의 편파왜곡보도와 부정선거 사례고발 및 규탄대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KBS 시청료납부 거부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여성이라면 누구나 분노에 떨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었다. 피해자인 권인숙의 폭로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알려지자 여성단체와 종교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부천서성고문대책위원회를 결성하여 전 국민적 항의를 조직해갔다. 당시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전반은 계급문제나 반독재 민주화투쟁 등을 우선적인 해결과제로 상정하고, 여성문제는 부차적인 혹은 계급문제 해결 이후의 문제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이유로 여성의 성까지 고문의 도구로 삼는 군사독재정권의 추악함에도 불구하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에 소극적, 혹은 관성적으로 대응하거나, 아니면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한 ‘또 하나의 투쟁’ 정도로 바라보는 경향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여성 단체들은 이러한 편견에 맞서 성고문 문제를 국민적 이유로 만들었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후 전 국민적인 민주화투쟁이 진행되자 여성들은 여성 고유의 특성을 살려 독재정권 때문에 남편이나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상징으로 보라색 수건을 쓰거나, 흰색 한복을 입고 최루탄추방운동에 앞장서는 등 민주화운동에도 동참하였다.
이러한 운동을 바탕으로 1987년 2월 21개 여성단체들이 모인 한국여성단체연합(여연)이 결성되었다. 이즈음 1970년대 민주노조운동의 주역들이 중심이 된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창립되었고, 한국여성민우회,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그리고 각 지역별 여성운동단체 등 계급, 계층, 지역을 근거로 한 여성운동이 활발하게 꽃피기 시작했다. 이 같은 여성단체들의 결성은 여성해방이라는 여성 고유의 과제에 자주, 민주, 통일 등 한국사회 공통의 과제를 포괄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중상류층 중심의 보수적 여성운동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지식인, 가정주부, 문화, 종교 등 다양한 계급과 계층, 취향을 반영한 대중운동으로의 발전 과정이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한국여성노동자회(여노회)와 한국여성민우회의 출현이었다. 1970년대 여성운동의 주력이었던 민주노조운동은 노동자로서의 억압과 착취 이외에 여성으로서 추가되는 억압과 착취에 대해서는 비교적 소홀했었다. 엄밀히 말하면 민주노조를 지키는 것만도 너무 버거웠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이기 때문에 더 얹어진 문제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들이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1987년 콘트롤데이타, YH노조 등의 여성 노동자들과 여성평우회 활동가들이 한국여성노동자회를 조직했고, 이후 인천, 부천, 부산, 성남, 광주, 마산, 창원 등 7개 지역에서 지역조직이 결성되었다.
여노회는 1989년 인천여성노동자회(당시 일하는 여성노동자의 집)와 인노협 여성국 공동으로 개최한 3.8여성대회를 시점으로 각 지역에서 매해 3.8여성대회를 개최해 여성노동자의 문제를 집약해 내는 한편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으로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89년 산업구조 조정기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위장폐업 반대 등 고용안정투쟁을 지원했고, 보육문제에 대한 공동 해결을 모색하는 등 여성노동자 조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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