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정치에 대한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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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세종대왕의 정치에 대한 평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유교정치의 실현 여부는 국가 행사나 사대부의 생활에서 五禮四禮가 얼마나 행해졌는지 여부로 가늠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유교정치의 형식적인 면일 뿐이다. 유교정치에서는 형식을 중요하게 보지만, 한편으로는 정치의 본령인 백성에 대한 정치를 보는 것도 중요하리라 본다.
세종시대 정치지배층의 대민정치가 어떠했는가는 그들의 대민의식이 어떠했는지와 크게 관계가 있다. 따라서 세종과 관료층의 대민의식을 먼저 살펴보아야 하는데, 크게 민본위민의식과 애민휼민의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의식은 유교의 민본사상과 관련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세종의 유교정치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품에서 우러나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民惟邦本’을 강조해온 세종은 백성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였다. 세종 원년 2월의 왕지에서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 죽은 자가 있으면 감사와 수령은 모두 교지불종의 律로 논죄하겠다”고 한 것은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또 세종 10년에 황보인이 가뭄을 이유로 금주령을 내릴 것을 청했을 때 세종이 “내가 술을 들지 않고 금한다면 금할 수 있으나 나는 금하지 않으면서 下民에게만 금한다면 범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라고 하면서 금주령을 펴지 않은 것도 민본위민의식이 없이는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물선진상의 감면조처, 신병치료를 위한 溫행차 때에 행한 민폐 감소 조처와 온천 근처 농민에 대한 피해보상조처, 농민의 편익을 위한 공법시행의 노력, 훈민정음의 창제 등은 모두 세종의 민본위민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세종은 기아질병취렴형벌 등 백성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는 데 성의를 다했다. 감옥에서 더위를 먹어 죽기까지 하는 수인들을 딱하게 생각하여 세종 자신의 더위를 이기는 경험을 그대로 수인들에게 베풀어준 일, 관비의 분만휴가를 7일에서 130일로 가급한 일, 관비가 분만할 때 婢夫에게 30일 동안의 동반휴가를 주어 산모(관비)를 구호할 수 있도록 조처한 일 등은 세계역사 어디에서도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일로서 세종의 애민휼민의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다.
세종의 민본의식은 관료층에게도 전이된 듯하다. 관료들의 계와 상소에는 민본위민의식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것은 백성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다. 실농한 州郡에 대한 조세면세를 위한 소청, 강무할 때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노력, 탐관오리의 엄중한 징계를 위한 소청, 민폐가 되는 조관의 파견을 금지하기 위한 소청, 조세역공물의 수취와 관련된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소청, 기민의 진제를 위한 소청, 남형혹형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소청 등은 관료층의 민본위민휼민의식에서 나온것으로 생각된다.
세종대 대민정치의 기본은 백성을 위하고 백성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있었다. 세종은 즉위유시와 여러 차례의 구언을 통하여 백성의 고통의 소재를 확인하고 이를 개혁, 개선했다. 또한 대민정치의 대행자인 감사와 수령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감사를 임명할 때에는 교서를 내려 그 지역의 중요성과 문제점을 일러주고 사명을 다할 것을 훈유하였고 유시를 내려 대민정치에 차질이 없도록 독려했다. 목민관인 수령을 임명, 파견할 때는 왕이 친히 인견하여 그 지방의 문제점을 일러주고 선치를 당부하여 백성을 위한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독려하였다. 세종이 직접 감사와 수령을 인견유시하며 독려하여, 대민정치는 더욱 좋은 효과를 보았을 것이라 볼 수 있다.
대민정치의 大綱은 백성의 부담과 고통을 덜어주는 데 있었다 조세요역공물진상의 부담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이를 경감하는 조치를 때때로 내렸고, 기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환자와 진제를 널리 베풀었으며, 欽恤之曲을 펴서 억울하게 형벌을 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고 형벌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노력했다.
세종시대 대민정치의 기본이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로써 민생문제, 백성의 고통을 완전히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군주와 관료가 민본위민의식을 가지고 민본위민정치를 위하여 노력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인재등용
세종대 과학기술의 유례없는 발전의 원동력의 하나는 그것을 헌신적으로 떠맡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료학자들과 과학자, 기술과학자, 그리고 신분이 낮은 장인(匠人)집단이었다. 그들은 세종의 정신적 물질적 지원과 격려로 고무되어 보람을 느끼면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종사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기록들은 이러한 사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도 장영실에 관한 기록은 정말 극적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장영실은 동래현 관노였다. 아버지는 중국에서 귀화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기녀였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그런 장영실이 어느 날 세종의 부름을 받았다. 「연려실기술」에는 “세종 3년(1421)에 남양부사 윤사웅, 부평부사 최천구, 동래관노 장영실을 내감으로 불러 선기옥형의 제도를 논란 강구하니 임금의 뜻에 합하지 않음이 없었다.”고 했다. 정말 파격적인 일이다. 임금이 궁궐 안의 서운관에 당대의 천문학자 두사람과 함께 관노 장영실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천문학의 기본이 되는 관측기기인 혼천의의 제도에 대해서 연구하고 토론했다. 그 자리에서 장영실은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이르기를, 영실은 비록 지위가 천하나 재주가 민첩한 것은 따를 자가 없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연려실기술」은 기록하고 있다. 세종대 최고의 기술과학자로서의 장영실의 인생은 이렇게 극적으로 시작되었다. 세종은 그 자리에서 장영실을 중국에 파견하여 천문기기의 자료를 수집 연구하도록 명했다. 놀라운 결단이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세종의 코드를 읽어라, 전경일, 서울: 한국경제신문, 2003
세종대왕의 정치철학, 조남욱, 부산대학교 출판부. 2001
세종 그가 바로 조선이다. 이한우, 서울: 동방미디어
세종 세대의 문화, 이성무 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1
세종학 연구, 제 12. 13집, 차문섭 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8
민족문화추진회 : http://www.minchu.or.kr
서울육백년사 : http://seoul600.visitseou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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