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의 성격 변화를 통해 본 삼별초 정부의 성격과 대여몽 전쟁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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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별초의 성격 변화를 통해 본 삼별초 정부의 성격과 대여몽 전쟁 연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三別抄는 원래 崔氏의 2대 집정자 崔瑀가 도적을 막고 치안을 유지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군대인 夜別抄를 군사가 많아지자 左ㆍ右別抄로 나누고 다시 崔沆 代에 몽골에서 도망쳐 온 자들로 구성된 神義軍이 합쳐 조직된 군대였다. 『高麗史』권81 兵志 1 兵制 元宗 11年 5月.
夜別抄는 高宗 19년에 처음으로 그에 관한 기록에 나타나고 同王 17년경에 盜가 많이 발생했음을 감안하여 크게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이어졌다. 閏 2月에 崔瑀는 大倉을 풀어 賑恤할 것을 청하였다(『高麗史切要』권16 高宗 17年 正月).
고종 17년에서 19년 사이에 조직된 것으로 파악된다. 당시의 崔瑀政權은 정적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따라서 夜別抄의 조직의 이면에는 정적을 제거하려는 崔瑀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盜를 잡는다는 것을 내세워, 실은 정적을 제어할 목적으로 夜別抄는 조직되었던 것이다. 盜를 잡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夜別抄가 崔瑀의 爪牙처럼 이용된 까닭이 여기 있다.
神義軍은 高宗 40년 也屈, 41년 車羅大 침입으로 많은 포로가 생기었고, 따라서 몽골로부터의 逃還人도 많았다고 생각되므로 이 시기부터 최초로 기록에 나타나는 同王 44년 사이에 조직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 시기는 몽골이 대거 침입한 후 파병의 철병의 조건으로 강화정부의 出陸還都를 끈질기게 요구한 때로, 崔沆으로서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관리들은 出陸還都 쪽으로 기울어졌고, 崔沆은 이러한 여론에 쐐기를 박고자 몽골로부터의 逃還人으로 神義軍을 조직하였다. 그들의 몽골에 대한 적대감을 出陸還都의 여론을 묵살하는데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김당택, 「최씨정권과 그 군사적 기반」『고려무인정권연구』(새문사, 1987)[『고려의 무인정권』(국학자료원, 1999) 재수록, pp. 307~322].
이처럼 이들은 기본적으로 公兵이기는 하였으나 동시에 무인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어 그 성격상으로는 私兵의 모습으로도 비쳐진다. 삼별초의 성격에 대해서는 연구자마다 약간씩 이해를 달리하는 부분도 있으나, ‘公兵的 私兵’ 또는 ‘私兵化한 公兵’ 등 이중적 성향을 지닌 군사조직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이견이 없는 듯하다. 민병하, 「최씨정권의 지배기구」『한국사』7(탐구당, 1973)[『고려무인정권 연구』(성균관대학교 출판부, 1990) 재수록] ; 윤용혁, 「최씨무인정권의 대몽항전자세」『사총』21ㆍ22합집(고대사학회, 1977) ; 김당택, 앞의 논문(1987) ; 김윤곤, 「별초군의 조직」『한국사』18(탐구당, 1993)[『한국중세의 역사상』(영남대학교 출판부, 2001) 재수록] ; 오영선, 「고려 무신정권기 사병의 성격」『군사』33(국방군사연구소, 1996).
그러나 초기 이와 같은 이중적 성격은 점차 변화를 겪게 된다.
權臣이 집권하자 이로써 爪牙를 삼아, 그 녹봉을 후하게 하고 혹은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고 또 죄인의 재물을 적몰하여 이에 주었기 때문에, 權臣이 마음대로 부리었고, (그들은) 앞을 다투어 힘을 다하였다. 『高麗史』권81 兵志 1 兵制 元宗 11年 5月.
이 기록은 당시 집정자와 三別抄의 관계를 서술한 것인데, 여기서 보이듯 權臣은 三別抄를 부리는 대가로 녹봉을 후하게 하고, 사사로운 은혜를 베풀었으며 죄인의 재물 또한 적몰하여 주었다고 한다. 三別抄를 사병처럼 부리면서 그에 대한 대가를 이처럼 과분하게 준 것에 무언가 석연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다시 보면 三別抄는 단순히 사병이라기보다 하나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힘을 빌리기 위해 집권자는 후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즉, 三別抄는 權臣의 사병으로서의 성격보다는 집권자와 모종의 계약을 통해 그 군사적 기반이 되어준 용병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략) (崔)가 급히 柳能을 불러 계책을 논의하였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柳)能이 말하기를 “밤이 저물어 어떻게 할 수 없으니, 夜別抄指諭 韓宗軌에게 글을 내려 설유하고, 밝으면 李日休 등을 불러 군대를 정돈하여 (金)仁俊을 쳐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하니, (崔)가 그렇게 여겼다. (중략) (金)仁俊이 子弟를 거느리고 神義軍에 달려가 (朴)希實ㆍ(李)延紹를 보고 이르기를 “일이 누설되었으므로 우물쭈물할 수 없다”하였다. 이에 지난번에 같이 모의했던 자와 別將 白永貞ㆍ隊正 徐挻ㆍ李梯ㆍ林衍을 소집하였다. (林)衍과 指諭 趙文柱ㆍ吳壽山으로 하여금 (韓)宗軌를 잡아 죽이게 하고, 또 指諭 徐均漢 등을 불러 三別抄를 射廳에 모았다. 『高麗史』권129 崔忠獻傳 附 傳.
기록에서 보이듯 三別抄는 崔를 죽임으로 崔氏政權 무너뜨리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崔氏家의 사병적 역할을 한 三別抄가 이를 무너뜨렸다는 것은 三別抄가 이미 조직 당시의 성격과 달리 하여 金仁俊의 용병으로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기록 중에 三別抄에 관한 또 다른 사실을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夜別抄指諭 指諭는 일종의 보직으로서 대개 郎將(정6품)급이 이에 임명되었고, 따라서 수하에 150~200여명의 병졸을 거느렸던 것으로 보이며 夜別抄의 주요 작전단위였다. 三別抄는 指諭를 중심으로 한 단위부대로 이는 『高麗史節要』에 夜別抄指諭로 기록된 金世沖이 『高麗史』에는 夜別抄指揮로 표기된 사실로도 짐작된다. 夜別抄의 단위부대들은 대체로 소규모였는데, 이러한 단위부대가 몇 개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일괄적으로 통솔한 지휘관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夜別抄의 단위 부대장들이 복잡한 지휘계통을 거치지 않고 집권자와 곧바로 연결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집권자는 이들을 상호 견제시킬 수 있었고, 아울러 집권자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게 만들었을 것이다(김당택, 앞의 논문,[『고려의 무인정권』(국학자료원, 1999) 재수록, pp.312~314]. 그러나 이와 같은 지휘체계는 집권자의 강력한 통제를 기반으로 하기에 이것이 무너지면 오히려 단위부대의 연합으로 인해 정권을 위협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었고, 또한 개별 단위부대별로 활약하였으므로 그들의 용병적 성격을 갖는데도 기여했을 것이다.
韓宗軌는 崔에게 협력한 반면, 趙文柱ㆍ吳壽山ㆍ白永貞ㆍ徐均漢 등은 崔 제거에 앞장선 것을 알 수 있다. 夜別抄 지휘관들의 행동이 이처럼 일치되지 못한 까닭은 그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으며, 이와 함께 근본적으로 그들이 일관된 통수체제를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三別抄는 단위부대별로 각자 의식을 가지고 협력자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사병집단이라기보다 이해관계에 따른 모종의 계약을 맺은 용병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崔氏政權이 몰락한 후 무인정권의 새로운 집정자가 된 金俊ㆍ林衍 등의 무인집정자들은 三別抄의 힘을 빌려 前代의 집정자를 몰락시키고 새로운 무인정권을 수립하였고, 끝내는 宋松禮도 三別抄의 힘을 빌려 林惟茂를 제거함으로써 100년에 걸친 무인정권을 붕괴시키게 된다. 이처럼 三別抄의 성격이 조직 당시와 같이 무인정권의 사병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점차 스스로 용병화 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三別抄는 사병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그들 스스로 용병화되었고, 넓게는 정권의 꼭두각시로서의 수동적인 집단에서 스스로 주체성을 가지고 정권과 연계한 능동적 집단으로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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