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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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임시정부의 수립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정식으로 일본제국에 나라를 강점당한 이후 한민족은 그 해 9월부터 독립국을 기어코 달성시키려는 열의로 국권회복을 위하여 끈질기게 일제와 대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에 이르는 기간에 한민족은 방황하지 않고 개화사상을 계승 발전하여 비밀결사적인 항쟁과 정신문화사적인 저항을 부단히 전개하였다. 더욱이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4년 만에 종결지어져 폭력의 시대가 가고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여 많은 약소국이 독립의 분위기로 휩싸여 있을 때였다. 그것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 안에 패전국에 소속된 국가들의 독립을 촉진하는 내용이 전 세계에 공개 인지됨으로써 더욱 그 자유화의 충격이 절실하게 받아들여진 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1916년 11월에 폴란드에 러시아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을 선포하였으며 다음해 11월에는 러시아의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됨으로써 동 12월에 핀란드가 완전 독립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 같은 독립국으로의 분리나 선포는 곧 전세계에 파급되어 1918년 10월 이후 독. 이 양 제국의 붕괴로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하여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같은 약소민족들이 각기 독립을 선포하고 정부를 수립하였다. 1919년 1월에는 반영운동을 전개하였던 아일랜드도 공화국을 선포, 독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같은 반응 속에서 당시 지사들의 독립열망을 읽어보면 그들은 그 해 4월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노동자의 대대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나 동맹파업으로 돌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파업을 적극 권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부 수립의 열망과 의지를 나타낸 구체적인 표현이었다.
더구나 독립을 선언하였으므로 정부를 조직해야 한다는 것은 지배적인 의견이었는 바 많은 민족지도자들을 비롯하여 이에 직접 가담 활동하던 지사들이 구금 투옥당하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도 나머지 지사들은 독립운동이 장기화 되어감에 따라 체계적이며 능률적으로 수행할 정부기구의 설립을 요망하였다.
즉, 임시정부의 확고한 구조적 기능을 발휘할 정부형태의 통제적 사명을 가진 기구의 출현이 무엇보다 요청되었던 것이다. 3.1운동 같은 거국거족적 독립시위운동 자체를 효과적이고도 조직적으로 발전시킬 기구의 출현을 갈망하였다는 것 자체가 독립지사들이 세계사적인 시각을 갖게됨과 동시에 근대정치의식이 그만큼 성장하였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갈망에 의하여 나타난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6개나 성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령의 대한국민의회정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정부의 3개처가 실제적으로 부서(副署)와 함께 근거지도 확실하며 옥사(屋舍)도 구비되어 있었을 뿐이고, 나머지 조선민국임시정부, 신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간정부의 3개처는 대체로 전단적(傳單的)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 몇 개의 임시정부는 1919년 9월에 상해의 임시정부가 통합의 의지를 받들어 개헌의 형식을 띠고 러시아령의 대한민국의회정부를 흡수한 뒤 서울의 한성정부와 통합함으로써 단일통합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해가 대한민국 원년이고 1945년 11월 23일 임정이 환국할 때까지 27년 동안 유일한 통제적 사명을 띤 정통 민간정부의 맥을 유지하면서 대표기관을 존속, 발전하였다.
(2) 수립의의와 성격
각기 다른 곳에서 임시정부가 성립되었지만 그 성격 중에도 공통성은 발견할 수가 있다. 그것은 첫째, 민족지도자로서 저명인사라면 본인의 취임 승낙 여부에 개의하지 않고 능력과 전공분야에 따라 각원으로 추대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속단체나 종파, 지역, 학벌을 초월하여 추대되었다고 보인다. 둘째, 군주제의 부활이나 잔재가 남아 있지 않고 임시헌장 등을 통하여 민주공화제라는 민간주도적인 국민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셋째, 6개처의 임시정부 가운데 4개처의 임시정부에서는 파리강화회의의 결과야 어떻게 유도되든 큰 기대를 걸고 비공식적이지만 정부의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청원하려 기도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넷째, 6개처의 각 임시정부는 각기 정부의 성립이 동양과 세계평화에 기여함이 적지 않기 때문에 이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천명하였으며,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강인성과 전통적으로 자립의지가 강렬하였음을 표방하고 있다.
(3) 통합단일정부의 추진
임시정부 수립 초기에는 지리적 여건과 일제의 감시, 탄압, 검거 때문에 국내외 각처에서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여러 가지 형태로 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임시정부 수립은 항일투쟁에 있어서 분산과 혼란, 통일의 약화를 초래할 뿐만 아니라, 대외적으로는 한민족의 통일된 정치 역량을 의심받게 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 통합이 요청되었다.
한성임시정부나 대한국민의회정부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각기 독자적인 통합절차와 타협을 모색하였으나 세 갈래의 각기 다른 이해관계에 따르는 강력한 주장은 혼선만 빚을 뿐이었다. 이때, 안창호는 상해정부와 러시아령 정부가 한성정부로 통합한다는 안을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한국민의회정부에 제의하여 정부통일의 결의사항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상해에서는 8월 18일부터 9월 17일까지 열린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헌법개정안을 상정하였다.
참고문헌
5. 참고문헌
이현희, 1991,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보훈복지공단
한국근현대사학회, 1998, 한국독립운동사강의, 한울아카데미
http://www.naver.com/
http://www.independence.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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