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교역자론 목회적 돌봄 상담사인 목사 기독교적 돌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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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부교역자론 목회적 돌봄 상담사인 목사 기독교적 돌봄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영국의 시인 초서(Chaucer)는 성직자들에 대해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자였지만, 초서는 그의 저서 『켄터베리의 이야기』에서 초기 성직자들의 돌봄에 대하여 호의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초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평신도들도 몸으로 실천하는 목회자를 원하고 있다. 목자가 양떼를 돌보는 것과 같이 돌보아주는 그런 목회자를 원한다.
그렇다고 단순히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자의 제일가는 목표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처럼 돌본다는 것이 목회적 돌봄의 커다란 도전이다. 찰스 재클(Charlss Jaeckle)과 윌리엄 클레브쉬(William Clebsch)는 목회적 돌봄 직능을, 치유(healing), 부양(sustaining), 지도안내(guiding), 화해(reconciling)의 네 가지로 말하였다.
또한 이들은 모든 시대를 통하여 돌봄 형태가 교회 안에 있었지만, 상황이 변하는 동안에 한 형태를 다른 형태보다 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말하였다. 예를 들면, 교회의 처음 두 세기 동안 목회적 돌봄은 흔히 적대하는 세상에서 삶의 흥망성쇠에 따라 영혼의 부영을 강조하였다. 그 다음 백 년 동안 로마제국의 기독교인 박해가 늘어감에 따라,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의 위협 아래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거나 퇴보 타락하게 되었다. 이 시기가 지난 다음 고해와 통회행위를 통하여 타락한 영혼을 교회 생활에 다시 돌아오게 하는 화해가 돌봄의 중심 초점이 되었다. 목회적 돌봄의 또 다른 중요한 변화는 4세기경(313)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수립한 뒤에 생겼다. 이때 교회가 직면한 일은 여러 다양한 그룹들을 제국과 교회의 정신사조에 동화시키는 막대한 과업이었다. 중세에 와서는 치유가 ‘영혼치료’(cura animarum)의 중요한 기능이 되었다. 그것은 일상생활 구석구석 어디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질병들을 치유해주는 교회의 잘 정돈된 성례전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일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두드러진 주제였다, 루터는 ‘교회의 바벨론 유배’(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라는 글에서 세례의 덕은 기독교인의 삶과 죽음 가운데 가장 큰 위안이라고 자주 극찬하였다. 루터의 “내가 어디서 은혜로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나?” 하는 물음은 루터교 신학과 목회적 돌봄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후에 계몽주의는 사람들이 근대사회, 즉 교회가 흔히 방심할 수 없고 사악한 것으로 여기는 근대사회를 살아가는 동안 교회가 그들의 영혼을 부양하도록 새롭게 압박하였다. 그래서 작은 그룹을 포함하여 개인적인 경건활동이 신도들을 부양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계몽주의 후기 기독교의 ‘후기 기독교 세계 시대’(post Christendomera)에는 목회적 돌봄이 여러 심각한 도전에 부딪쳤는데, 즉 계몽주의는 교회의 의식(rite)과 성례전의 효능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치유는 한 때(교육, 사회사업, 예술 등등과 함께) 교회의 독립적인 영역이었으나, 점점 그 교회의 근원지를 떠나서 독자적인 세속 활동이 되어 버렸다. 새로 발견된 ‘이성’은 개인복지를 위한 교회의 옛 처방을 의심하였다. 많은 영혼들이 치유와 부양과 지도 안내와 화해를 위하여 다른 곳을 찾아가기 시작하였고, 많은 사제와 목사들은 돌보는 일의 권위를 잃어 버렸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개신교 종교개혁은 영혼 돌봄에서 위기를 초래했다. 즉 목사의 권위 출처가 교회의 본성으로부터 성서의 권위나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바뀌었다. 목사의 자기정체성도 성례를 통한 치유 은총의 전달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기 위해 부름받고 훈련받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즉 종교개혁 1세들의 믿음과 실천과는 반대로,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교회 안에서는 특히 성례전과 공중예배가 목회적 돌봄 현장의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클래브쉬와 재클은 “종교개혁이 교회와 교회론을 크게 드높인 것은 결코 영혼치료에 대해 혁명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은 가톨릭이 사변신학과 실제 안내, 고해 경건과 눈에 보이는 은총의 수단들을 종합하였던 것을 깨고 말았다. 종교개혁은 인간의 죄악 된 본성과 행위를 통한 구원의 불가능,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을 철저하게 강조함으로써, 오랜 동안 죄와 고해를 서로 관련시켰던 것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불가피하게 새로 대두되는 경제체제가 요구하는 것에 따라 개인행동을 위한 여러 규범을 주어 지키게 하면서, 그 나름대로 율법주의를 만들었다. 그래서 구원은 교회와 성례전과 공동체와 전통 밖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편리한 물건처럼 되어버렸다. 결국 개인은 자주 진노하시는 하나님과 화평을 맺는 길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도록 내버려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설교란 루터가 체험했던 은혜로운 하나님을 전하는 것과 거리가 멀게, 정죄하는 아버지의 잔소리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따라서 목회적 돌봄은 차츰차츰 목사와 개인성도 사이의 일대일 관계로 떨어지게 되었다. 목사가 신앙공동체와 함께 신앙공동체를 위하여 행하던 활동과 표징들은 이제 거의 전적으로 목사가 개인에게 전해 주는 생각, 말, 감정이 되어 버렸다. 많은 개신교인들이 루터가 말한 ‘믿는 자들의 사제직’은 목사의 그 어떤 사제직 활동마저 의심하게 만들었다. ‘목사(pastor)는 ’사제‘(preist)와 아주 대조적인 것이 되었고, 이른바 사제적 직능이 가진 목회 측면들을 무시하게 된 것이다.
종교개혁이 공중 예배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오로지 성직자의 전문 영역이었던 예배를 일반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줌으로써, 기독교 예배를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는, 성서적이고, 공도체적인, 행동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결국 성례전을 해체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었고, 교회의 공동체 예배는 산산이 쪼개져 사사로운 개인적 경건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주일 아침예배는 말 많고 훈계로 가득한 도덕적 잔소리뿐인 설교자와 성가대의 퍼포먼스로 퇴화했다.
예전에는 목사가 영혼치료에 관련된 활동들을 하면서 양떼를 돌보는 일이 대체로 양떼들을 예배로 인도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회 예전학자인 융만(Jungmann)의 ‘여러 세기 동안 활발하게 진행된 예배(liturgy)가 가장 중요한 목회적 돌봄 형태였다고 하는 대범한 발언에는 상당한 진리가 들어 있다. 치유는 기름 바르기나, 성자들, 또는 성자들의 유물에 기도하는 것과, 여러 가지 형태의 귀신축출을 뜻하였다. 화해는 사람들 사이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를 다시 세우기 위한 목회적 돌봄인데, 전통적으로 용서, 죄의 고백, 고해와 속죄 등 의식적인 행위를 뜻하였다. 부양은 성만찬과 견진과 그 밖의 눈에 보이는 공동체적 뒷받침 같은 구체적 활동을 집행하는 것을 뜻한다.
이전 시대 교회의 목회적 돌봄과 우리 현대의 돌봄 사이의 중요한 차이는 주로 공동체적이고, 사제적인, 예전 활동을 활용하던 돌봄으로부터, 널리 퍼져있는 세속치료의 영향을 받은 개인주의적이고 심리학적인 치료기술로 한정된 돌봄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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