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으로 본 한국 역사 고대 삼국 고려조선 건국에 대한 그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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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뜻으로 본 한국 역사 고대 삼국 고려조선 건국에 대한 그의 역사인식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대: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연대는 반드시 그대로 정확한 것은 못될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미루어 생각할 수는 있다. 기원전2300년쯤이다. 단군 이야기에는 풍백,우사,운사하는 이름이 있어, 이미 농업을 주로 하게 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냥을 그만두고 짐승을 치고, 한 곳에 붙어 농사를 짓게 되면 그것은 큰 변동이다. 곳곳에 고인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죽음에 대해 벌써 깊은 생각을 했던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종교사상이 발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종교는 다신교였다. 단군조선은 나라를 세운 후 1천2백 년 넘게 이어 있었다. 단군조선이 왜 망하게 되었나, 그 원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 수는 없으나 단군조선이 끝난 것은 사실이다. (1)부여: 부여는 단군의 직계에서 나왔던 모양으로 문화의 수준도 가장 높았다. 처음에는 나라가 매우 성하여 여러 나라 중에서 으뜸가는 지위에 있었으나 늘 한족과 선비족이 쳐들어와 나라 힘이 떨어지고 후에 내란으로 두 부여가 되었다가 고구려에 합쳐져 버렸다. (2)읍루: 부여 동쪽으로 지금 러시아 땅에 읍루가 있었다. 임금이란 것이 없고 활쏘기를 잘하여 활, 살이 그 유명한 산물이다. (3)옥저: 읍루에서 남으로 내려와 함경도에 오면 옥저가 있다. (4)졸본: 장백산 골짜기 골짜기에는 조그마한 여러 나라가 있었다. 그중에서 유명하게 된 것이 졸본이다. 졸본은 본래 조그만 나라였는데 동명성왕 주몽이 동부여에서 와서 그 나라를 얻어가지고 고구려를 세움으로부터 나라 힘이 떨치게 되었다. (5)기자조선: 압록강 하류에 내려오면 요동으로부터 황해도, 평안도 지방에 걸쳐 기자조선이란 나라가 있었다. 옛날부터 있는 기록에는 이 나라의 시작에 관하여 중국 은나라 왕족 기자가 그 나라가 망할 때에 조선에 들어와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평양에 정하고 8조로써 백성을 가르쳤다는 말이 있다. 그 기록은 훗날 중국 숭배사상에 중독된 데서 나온 것이며 사실 기자가 와서 임금이 되었을 수는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주의할 점은 중국 이민과 중국 문화가 흘러든 것, 더구나 그로 인한 경제 변동이다. 사실 고구려의 역사는 이것을 생각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산속에 끼여 있던 졸본이 일약 대고구려가 되게 되는 것은 여기서 받은 큰 충격과 이 이족적인 것을 겨루어보려는 노력에서 나온 것이다. (6)삼한: 한강을 건너 삼남지방에 가면 삼한이 있다. 마한이 그 중 가장 강대하여 충청 전라의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고, 54개의 작은 나라가 합하여 된 것이었다. 단군조선 천 년이 민족문화가 싹트는 시기라면 이 열국시대 천년은 그 못자리 시기다. 큰 단체 속에서는 도덕 수준이 내려가는 것은 보통이고 남을 따라 기계적인 활동을 하기 쉽다. 단군조선으로부터 열국시대로 옮겨온 뜻은 약해진 듯하나, 사실은 강해지기 위한 것이었다. 제각기 여러 가지의 환경으로 나눠주어 거기서 능히 위대한 혼의 힘을 발휘하고 나오는 놈을 골라 다음에 올 민족통일의 대표자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시대 천 년을 통해 제일 큰 사건은 ‘한사군’이다. 전한 무제는 위씨조선을 멸하고 거기에 네 고을을 두어 직접 통치하였다. 그것은 4백 년 동안 한민족에게 던져준 하나님의 과제였다. 이것을 깨닫고 분연히 일어선 것이 고구려였다. 그들은 이것을 몰아내기에 전 역량을 기울였다. 한민족은 4백 년의 쓰라린 경험을 치러보고서야 비로소 자각이 조금씩 생기게 되었다. 또 정치사상도 거기에 따라 발달되었다. 삼국시대의 고구려는 이 일이 아니고는 있을 수 없었다. 4백 년은 무의미한 불행만이 아닌 것이고 이 불행 중에서도 중국의 높은 종교·도덕의 사상에 접함으로 정신 발달이 자못 왕성하게 되었고 다음에 오는 삼국시대 문화가 자라나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