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이해 원나라의 정치 사법 문화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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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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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태조는 처음으로 일세일원제를 채택하고 시정의 기본방침을 한족의 부흥으로 삼았다.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호예병형공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 감찰은 도찰원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 군사는 도지휘사사, 감찰은 안찰사사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명의 문화정책은 처음에는 복고국수주의몽골색 불식에 힘을 기울였으나 뒤에는 경제발달, 서민생활의 향상, 도시의 번영, 교육의 보급에 따라 대중적 색채가 짙어졌다. 또한 유럽의 과학사조가 들어와 그 영향도 받았다. 먼저 사상면에서는 몽골인에 압박을 받은 유학의 전통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영락제 때에는 송나라 주자학의 부흥에 힘써 송학을 집대성해서 《성리대전》 《사서대전》 《오경대전》의 주석서를 칙찬하였는데, 이것은 과거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이 송나라 육구연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을 주창,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뒤 그 학설은 양명학으로서 크게 번져 명말에는 사상계를 주도하였다.
불교는 원대에 라마교가 성행하여 침체에 빠졌으나 명대에는 국가적 보호를 받아 대장경도 간행되었다. 뒤에 도교가 보호를 받아 불교는 강력한 압력을 받았으나, 침잠 속에 사상적으로는 활기를 띠어 교의상 각 종파를 통합하려는 혼융불교가 주창되었으며 또한 유 불 도 3교의 조화설도 발달하였다. 도교도 크게 성행하여 《도장》을 집성하였고, 가경제의 열광적 신앙에 힘입어 전성기를 이루었으나 일반적으로는 미신적 형태로 민간에 보급되었다. 학문 숭상의 기풍도 짙어 성조 때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영락대전》 등 많은 칙찬서가 간행되고, 민간에서도 저장 범씨의 천일각, 장쑤 모씨의 급고각과 같은 대장서가가 나와 역대의 정사가 합각되어 남감본 북감본 급고각본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기평림》 《한서평림명의 문화정책은 처음에는 복고국수주의 몽골색 불식에 힘을 기울였으나 뒤에는 경제발달, 서민생활의 향상, 도시의 번영, 교육의 보급에 따라 대중적 색채가 짙어졌다. 또한 유럽의 과학사조가 들어와 그 영향도 받았다. 먼저 사상면에서는 몽골인에 압박을 받은 유학의 전통적 지위를 회복하고자 영락제 때에는 송나라 주자학의 부흥에 힘써 송학을 집대성해서 《성리대전》 《사서대전》 《오경대전》의 주석서를 칙찬하였는데, 이것은 과거의 참고서가 되어 사상통제적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중기에 왕수인이 송나라 육구연의 학설을 계승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인격주의의 이상철학을 주창, 유학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은 뒤 그 학설은 양명학으로서 크게 번져 명말에는 사상계를 주도하였다.
학문 숭상의 기풍도 짙어 성조 때는 방대한 백과사전인 《영락대전》 등 많은 칙찬서가 간행되고, 민간에서도 저장 범씨의 천일각, 장쑤 모씨의 급고각과 같은 대장서가가 나와 역대의 정사가 합각되어 남감본 북감본 급고각본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기평림》 《한서평림》 《십팔사략》 《당송팔대가문》 《당시선》 등 계몽서도 유행되어 학문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었고, 《천하일통지》 《광여도》 《직방지도》 등 지리서와 각 지방지도 많이 간행되었다. 그러나 특히 이채를 띤 것은 경세실용학과 유럽 학술의 유입이었다. 전자는 양명학이 좌 우 2파로 갈라진 뒤 우파가 제창한 실학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고염무황종희 등은 공소한 양명학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입장에서 정치와 사회에 실제적으로 도움이 될 학문을 확립하였는데, 이 학파는 후에 청대에서 성행한 고증학의 선구가 되었다. 후자는 특히 예수회의 선교사가 포교수단으로 전한 유럽의 과학이다.
마테오리치아담샬 등의 천문 역법 수학 지리학 포술학은 환영받았으며 그 중에서도 포술은 청군과의 싸움에서도 활용되었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세례를 받고 그 학문을 배운 서광계이지조 등 지식인들은 재래의 학문이나 종교에 자극을 주었다. 서광계의 《농정전서》 《기하원본》, 이시진의 《본초강목》, 송응성의 농공업을 도해한 《천공개물》, 조사정의 총포구조를 기술한 《신기보》 등은 모두 유럽 과학의 많은 영향을 받은 저서이다. 또한 리치가 《곤여만국전도》를 소개하자 중화사상을 믿고 있던 한족에게 미지의 세계를 알려 줌으로써 세계관에 영향을 끼쳤다.
문학에서는 복고조의 시문, 서민적인 색채가 짙은 소설과 희곡이 특징을 보여 사회계층의 상 하 구별 없이 문화적 융합을 이루었는데, 특히 소설과 희곡은 대표적인 명대문학으로, 한의 문, 당의 시, 송의 사, 원의 곡과 견줄 만하다. 이 중 소설은 문어체보다는 백화체의 장편이 주류를 이루어 사대기서라 일컫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금병매》 등은 모두 명대에 완성된 것이고, 《금고기관》은 송 원 명 3대의 단편명작 40편을 집성한 것이다. 이 소설들은 모두 유 불 도 3교의 사상이 융합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다.
희곡은 처음에 북곡이 성행하였으나 남곡에도 고명의 《비파기》와 같은 명작이 있었다. 중기 이후에는 남곡의 노래양식과 악기를 통일한 곤곡이 만들어져 남곡은 만력때 전성기를 맞아 탕현조는 당대 제일의 걸작 《옥명당사몽》을 만들었으며, 그 중 는 라는 별칭으로 후세에 전래되어 인기를 얻었다.
회화는 명대에 들어 급속히 복고운동이 진전되어 원대에 폐지된 화원을 재건하여 궁중화가를 양성하고 화가를 우대하여 작품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특히 선덕제 이후 많은 유명화가가 활약하여 마원 계통의 예단, 하규 계통의 주문정, 후에 절파의 개조가 된 대진 및 이재 등이 당시의 화단을 주도하였다. 절파의 화풍은 마원 하규의 송나라 원체화에다 원나라 초에 화승들이 즐겨 그린 수묵체를 배합한 거친 필법으로 다룬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빈약하고 형식에 치우쳐 퇴색하였다.
한편 당초에는 화원의 후원자였던 명나라의 황제들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화가의 자유를 속박하였기 때문에 화가의 활약도 점차 침체되었다. 이러한 화원의 어용화가와는 달리 재야의 화가들이 점차 두각을 나타내 명대의 화단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는데 그 중 손꼽히는 화가는 구영이다. 그는 남송화원의 화가 진각을 개조로 하는 원파에 속하여 그 정통화풍을 계승하면서도 이당 마원 하규와 문인화가인 심주의 그림양식을 배합하여 원파의 영역을 벗어나 일가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