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근현대사상 자유민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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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의 근현대사상 자유민권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일본에서 187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에 걸쳐 메이지 절대주의 정권에 맞서 민주주의적 개혁을 요구한 국민적인 정치운동이다.
자유 민권 운동은 정한론에서 패배하여 사직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 고토 쇼지로 등이 1874년 애국공당(愛國公黨)을 결성했으며 정부 관료의 전제를 공격하고 민선의원의 설립을 주장하는 민선 의원 설립 건백서를 좌원에 제출했다. 이는 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널리 호응을 얻어 국회개설, 자유민권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그 배경에는 개국 이래로 서구 사상과 문화의 소개와 섭취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던 점, 전통적인 향촌 사회의 자치권까지 부정하는 중앙 집권제적 정부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하고 있었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 에도 막부 말기,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이다. 일본에서는 자유민권운동의 주도자로 알려져있다. )
이러한 움직임 속에 고치에서 릿리사가 결성된 것을 계기로 각지에서 정치결사가 조직되었으며 1875년 2월에는 전국적인 아이코쿠샤가 결성되었다. 이러한 반정부운동의 고양에 직면한 정부는 여론을 완화하고자 1875년 2월 오쿠보 도시미치, 이타가키 다이스케, 키도 다카요시와의 오사카회의를 성립시켰다.(이타가키 케이스케, ‘죽어도 자유는 죽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 결과 정부는 점차적으로 입헌정치를 만들겠다는 점차입헌정체수립을 공표하고 이어 원로원, 대심원, 지방관회의를 설치함으로써 삼권분립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은 형식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잔보리쓰(여기서 잔보리쓰란 참방율로 화족이나 관리를 비판하는 자를 벌하는 언롭탄압법규를 말한다.), 신문지 조례법을 제정하고 출판조례를 개정함으로써 자유민권 입장에 서는 정치평론, 반정부언론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신문지 조례법을 통해 매체의 반정부 활동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릿시사’의 설립 : 1874년 4월10일 다이스케 는, "3000만명(당시의 일본의 인구)의 모든 사람들은 평등해서, 귀천존비(貴尊卑)의 구별은 없다. 사람들은 모두 각각 목숨이 있어서, 각각의 직업이 있어, 곤란했을 때는 복지를 받고,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自由)로워서, 일정한 권리가 있는 사람들인 것은, 잘 생각하면 누구나 알아차릴 것이다" 라고 말하고, 도사(土佐)에 릿시사(立志社)를 만들었다.)
정부에서도 1875년에는 점진적으로 국가 입헌의 정체를 수립하겠다는 조서를 발표하였고, 헌법 기초에 대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편, 정부는 1878년에 삼신법(三神法)을 제정해 부분적으로 국민의 의사를 받아들여 지방 제도를 개편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탄압조치로 자유민권운동은 다소 주춤해지기 시작했으나 1877년 6월 릿시샤가 국회개설건백서를 제출하였고 1878년에는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다시 합류하여 재흥을 꾀하였다. 한편 자유민권운동은 호농상층의 참가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그들은 지방민회의 설립을 요구하고 나아가 1878년 지방삼신법에 의해 설치된 부현회를 거점으로 하여 정치적 세력을 증대시켰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한 정치결사가 전국 각지에 조직되어 광범위한 정치참여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재건된 아이코쿠샤는 1880년 제4회 대회에서 국회기성동맹이라 개칭했으며 이듬해에는 자유당으로 결성되었다.
자유당 급진파는 몰락하는 중·하층 농민과 연계하여 청원운동을 전개했다. 이 와중에 1881년 훗카이도 개척사 소속의 관물을 비정상적으로 싼 가격에 불하한 사건이 일어나면서 국민의 정부에 대한 비판이 높아졌으며 국회개설운동에 박차게 가해지게 되었다.
이에 오쿠마 시게노부는 자유민권파에 동조하여 국회개설의견서를 제출하고 헌법제정 등을 주장했다. 이에 정부는 오쿠마를 추방하는 한편 ‘국회개설’의 초서를 내려 회유책을 강구했다. 이에 순응하여 이타가키와 고토는 외유하게 되고 추방된 오쿠마는 1882년에 입헌개진당을 결성했다.(오쿠마 시게노부는 근대 일본의 토대를 마련하고, 개진당을 조직하여 민권운동을 추진하였고, 2차례에 걸쳐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하였다. 현재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동경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후쿠시마 사건(1881.11)의 처리에서 나타났듯이 탄압의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과격파는 반정부 실력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1884년 10월에는 불황과 부채에 허덕이는 지치부 군의 농민들이 차금당, 곤민당 운동을 기반으로 무장봉기하여 군내를 제압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차금당, 곤민당: 고리대금업자에게 이자 감액과 차금장 말소를 요구)
운동이 격화되자 농민의 혁명화를 우려한 이타가키 등 자유당 주류는 1884년 10월 자유당을 해산시켰으며 입헌개진당도 수뇌가 탈당하여 운동은 완전한 침체기에 빠졌다. 그러나 1886년 구 자유당의 호시 도루는 입헌개진, 자유 양당의 대립을 초월해서 대동단결 할 것을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