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 출사표 제갈량 중국 산문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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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승상인 諸葛亮(181-234)은 걸출한 정치가요 전략가로 자가 공명(孔明)이며 산동성 기수현(沂水縣)사람이다. 어려서 아버지와 사별하고 숙부 제갈현(諸葛玄)을 따라 형주(荊州)에 살면서 밭을 갈고 독서로 소일하며 생활하였는데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17세에 숙부가 죽은 후 양양 서쪽 20리 떨어진 유중에서 밭을 갈며 치국안민(治國安民)의 구상에 몰두했다.
建安 12년(207) 장판교싸움에서 조조에게 패한 유비는 곤궁한 때에 서서와 사마위의 천거로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간다. 이를 삼고초려(三顧草廬)라 한다. 삼고초려란 ‘초려를 세 번 방문하다’라는 말인데 제갈량은 여행을 즐겨해 오고감이 일정치 못했다. 그래서 유비 삼 형제가 처음 찾아간 날에도 그는 없었고, 두번째 찾아갈 때에도 그는 없고 다만 동생 제갈균만이 있을 뿐이었다. 관우, 장비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우여곡절 끝에 관우, 장비의 만류에도 유비는 태공망의 일화를 들려주며 정성을 다해 추운 겨울날 세 번째 방문을 하였다. 그리고 눈물로서 설득해 제갈량의 마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 후 유비의 삼고초려에 감동되어 유비를 따라 나선 제갈량은 이때 나이가 겨우 27세 였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손권과 연합할 것을 제의하여 적벽에서 조조를 대파하고 형주를 얻어 근거지로 삼은 다음, 다시 익주(益州)로 쳐들어가 한중(漢中)을 점령했다.
221년 유비가 촉한의 황제에 오른 후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위, 촉, 오로 천하를 삼분하자는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고수하며 불세출의 지장으로 천하를 종횡무진 했다. 후에 유비와 제갈량은 더욱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그 관계가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되었다. 수어지교란 물고기와 물의 사귄다는 말로 즉, 유비는 자신과 공명을 물고기와 물에 비유해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라 하였다. 그만큼 공명을 신뢰하였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223년 유비가 병들어 죽자, 제갈량은 아들을 부탁한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후주유선(後主劉禪)을 극진히 보필하면서 촉한의 실질적인 일인자가 되었다. 촉한은 당시 吳나라 정벌에 실패한 후, 남만(南蠻)까지 반란을 일으켜 형세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제갈량은 군사를 정비하고 농업을 장려하며, 법령을 정비하여 상벌을 분명히 하는 등 혼신의 힘을 쏟아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얼마 후 다시 안정을 회복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건흥(建興) 3년 (225) 군사를 이끌고 나가 남만을 평정한 후, 건흥 5년(227)부터 12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조위(曹魏)의 정벌에 나서 중원(中原)을 빼앗기도 했으나, 보급이 충분한 위(魏)가 수비에 치중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지 못하고, 결국 건흥 12년(234) 8월에 군중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현재 그의 글을 모아 문집으로 펴낸《제갈공명집(諸葛孔明集)》이 있다.
2. 시대적 배경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 오(吳), 촉(蜀) 3국이 정립했던 시대이며, 중국 역사에서 가장 복잡했던 시기 가운데 하나였다.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뤄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둥(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食客)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현신(賢臣) 제갈량(諸葛亮)을 삼고초려(三顧草廬)를 통해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吳)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揚子江]의 중 ·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위국(魏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 ·둔전제(屯田制)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 ·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국토도 좁고 가장 약하였으나, 한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원의 회복을 뜻하여, 수차에 걸쳐 위에 도전하게 된다. 하지만 유비(劉備)는 北方 魏나라의 땅을 收復하지 못한 채 철천지 恨을 품고 죽게된다. 제갈량(諸葛亮)은 유비의 유언인 北方의 收復을 위해 노력하여 결국 군사를 이끌고 魏나라를 치기 위해 떠나던 날 아침, 유선(劉禪)에게 나아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면서 表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각 분야의 현신(賢臣)을 추천함과 동시에 유선(劉禪)에게도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올린다. 하지만 위 공략은 학소, 사마의(司馬懿)에 의해 지지부진 하게 되고 결국 제갈량은 오장원 전투 중 과로로 병사하게 된다. 그 후 魏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3. 작품읽기 - 懸吐
臣亮言(신량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