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인 독법 레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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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문학적인 독법’. 어디까지가 문학적이고 문학적이지 않은 독법은 무엇이 있을까. 문학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문학이라고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일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어느 한계점에 다다르면, 문학적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것을 깨닳는다. 어떤 독자에게는 가슴 깊이 파고들어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어떤 독자에게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알게 되는 계기가 되거나, 몸서리치면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딱 잘라버리기도 한다. 이것은 문학의 가치에 관한 이야기다. 문학은 글로써 독자에게 상상력을 유발시키고, 대중문화와 같이 숨은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하다. 시나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 혹은 만화보다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이며 문학의 특성이자 문학을 읽는 방법, 즉 독법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문학적인 독법은 대중문화에서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영화 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되겠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시선으로 영화를 담아내 마치 영화를 한편 봤다기보다는 잘 쓰인 소설책을 본 느낌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의 행동이 평면적이거나 행동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 행동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의 에서도 문학적인 면이 잘 드러난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함께 제자와 스승의 선문답 형식으로 던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다. 보스의 여자를 사랑한 조직원이 어떻게 복수하느냐가 아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감정의 흔들림을 조직에 속한 남자의 환경에 맞추어 폭력으로 드러내고 있다. 주인공인 선우는 보스에게 이유를 묻지만, 정작 이유를 제일 잘 아는 것은 선우 그 자신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같이 조금만 스쳐도 크게 흔들리는 젊음의 한 가운데에 서있기 때문이다. 젊음은 꿈과 도전을 심어주지만, 작은 일에도 크게 반응하는 예민한 가슴을 품고 산다. 단 한번의 애정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마지막 죽어가는 순간에 한번도 잡지 못했던 그 사랑이 간절해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누르는 그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아도 긴 여운을 남긴다. 말로는 다 못하는 것을 담아내어 더 크게 가슴에 닿는 일련의 과정, 이것이 바로 문학적인 이야기다.

미국 문학은 특히 인간관계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오바마 북클럽에 선정된 조지프 오닐의 , 스콧 피츠제럴드의 , 폴 오츠의 와 같은 책들이 그 예가 되겠다. 인간은 끔찍이 개인적이지만, 절대로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나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다른 자아를 가진 여러 인간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은 다인종이 모여 사는 국가이기 때문에, 소통에 대해 타 국가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 하다. 레이먼드 카버는 이 소통을 포커스로 맞춰 열두편의 단편 소설을 썼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은 아내의 맹인 친구를 처음에는 우습게 보던 남편이, 함께 연필을 쥐고 성당을 그려나가면서 그를 이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볼 수 있는 자가 볼 수 없는 자에게 하는, 상투적인 말도 도와주려는 행동도 찾아 볼 수 없다. 그저 그들은 ‘같이’ 그린다. 카버는 그리는 행위 자체로 소통을 잡아냈다. 판이하게 다른 두 자아가 손을 맞잡은 채, 하나의 세상을 그린 다는 것.
나와 타인 사이에서 쌍방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을 때, 결국은 타협점을 찾게 하거나 서로의 이해점을 끌어내는 매개체나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 그것을 통해 되지 않을 것 같던 서로에 대한 이해가 시작이 시작 되는 그 순간. 작가는 최소한의 말로 최대한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군더더기가 없다 못해, 담백하다 못해, 심심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전혀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이다. 그 안의 담겨있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밀도가 높기 때문이다. 미국 문학에 대한 편견을 깨는 ―사실, 이 편견이란 것도 일종의 의사소통의 부재가 아닐까 싶다. 우리 주위에 늘상 일어나는 일이지 않는가. 알고보니 걔 착하더라(또는 나쁘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 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소통이 이뤄진 후에는 자신의 편견을 반성하는. 비단 미국 문학 뿐이 아니라, 다른 나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마치 ‘아, 수학은 너무 어려워!’ 하고 수학을 기피하는 문과생과 같은 모습이다. 자신의 의사만 전달하고 소통을 하려고 하지 않는 유아적인 태도로 문학을 대하지는 않았을까.
허스토리도, 히스토리도, 하나의 명칭일 뿐 결국은 여자와 남자를 총칭하는 ‘인간’의 역사일 뿐인데 왜 이름을 가지고 부득불 그렇게 에너지 소모전을 벌이는 것인가. 단지 이름일 ‘뿐’이다. 서로 자신의 의사만 전달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인정해가며 옳은 정신을 물려주면, 그것이 진정한 ‘역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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