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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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18세기에는 여러가지 점에서 아직 바로끄적 화려함과 과장됨을 계승하고 있고 심지어 그런 면의 완성을 이룩하고 있으면서도 17세기가 장려(壯麗)취미를 끝까지 자명하고 당연하다고 보았던 태도는 이미 낯선 것이 된다. 그리하여 이 시대의 작품들은 사회의 최상류층을 다루는 경우에도 웅대하고 영웅적인 기풍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끄와 로꼬꼬의 전통에 대한 공격은 두 개의 상이한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두 경우 모두 궁정적 취미와 대립되는 동일한 예술이념에 입각해 있다. 루쏘와 새뮤얼 리처드슨, 그뢰즈와 윌리엄 호가스로 대표되는 감성주의와 자연주의가 그 하나의 방향이고, 레씽과 빙켈만, 멩스와 다비드의 합리주의와 고전주의가 다른 하나의 방향이다. 양자 모두 궁정적 화려취향에 반대하여 청교도적 생활태도의 단순함과 진지함이라는 이상을 내세운다. 하지만 18세기 말이 되면 유럽의 유일한 대표적 예술은 오직 부르즈와적인 방향으로 흐른다. 그리고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진 외국의 예술에서 보다 동시대의 철학적,문학적 운동들에서 더 강한 자극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위대한 세기의 종말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 정치적 절정에 이르고 낭만주의에서 그 예술적 목적지에 이르는 시민 예술의 발전은 필리쁘 섭정시대에 절대적 권위의 원리로서의 왕권이 붕괴되고, 예술과 문화의 중심으로서의 궁정이 와해되며, 절대주의로서의 권력추구와 권력에 대한 자의식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었던 예술양식 으로서의 바로끄 고전주의가 해체되면서 시작한다. 이러한 움직임과 동시에 고전주의 비판 또한 기반을 획득하여 궁정예술의 해체를 촉진한다. 더불어 이미 전통과 진보, 고대와 근대 그리고 합리주의와 감성주의 상의 싸움이 시작되어 루쏘의 전기로 의해 결말이 난다.
섭정시대
루이 14세 만년에는 국가와 궁정이 맹뜨농 부인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베르싸유궁의 침울할 만큼 장중하고 고집스럽게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귀족들은 이제 안락한 느낌을 갖지 못하였다. 왕이 죽었을 때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특히 오를레앙 공 필리쁘의 섭정을 통해 전제주의 로부터 벗어나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필리쁘는 진작부터 백부(루이 14세)의 통치조직이 시대에 뒤졌다고 생각하여 섭정의 자리에 오르자 모든 방면에서 옛 방식에 반대되는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루이 14세 시대에는 정신활동의 전 영역이 왕의 비호하에 있었다. 그의 곁이 아니고는 달리 보호처가 있을수 없었으며 더구나 그를 반대하는 보호처란 있을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문화의 새로운 보호자, 새로운 후원자, 새로운 중심이 등장한 것이다. 미술의 대부분과 문학 전체가 궁정이나 왕과 관계없이 발전하게 된다.
귀족과 부르즈와지
1781년의 칙령 이후에는 시민계급 출신들은 군대에서 전면적으로 축출되었다. 고위성직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17세기에는 지도급 성직자 가운데 가령 보쒸에나 플레쉬에 처럼 귀족 아닌 사람도 얼마간 있었으나 18세기에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이리하여 귀족과 부르즈와지 사이의 경쟁관계는 한편으로 점점 더 첨예화되었지만, 그것은 다른 한편 지적으로 더욱 승화된 경쟁의 형태를 취하여 매력과 반발, 모방과 기피, 존경과 원한이 이리저리 뒤얽힌 다양한 정신적 관계의 복잡한 그물을 형성하게 되었다. 시민계급이 물질적으로 대등하고 실제적인 면에서 우월한 데에 자극받아 귀족계급은 혈통이 다르고 내력이 상이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두 계급의 외면적인 상황이 날이 갈수록 비슷해짐에 따라 귀족에 대한 부르즈와지측의 적대심은 더욱 격렬해졌다.
시민계급의 새로운 부
르네쌍스 시대의 시민계급의 부는 16세기에 있었던 국가적 대파산으로 인해 분산되고, 재후와 국가가 스스로 큰 사업을 벌이던 절대주의와 중상주의의 전성기에도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중상주의적 세계정책이 폐기되고 자유방임주의가 채택된 18세기에 와서야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개인주의적 경제원리에 입각하여 다시 힘을 얻게 되었으며, 귀족이 사업에 손대지 않는 데에 힘입어 상인과 실업가들이 이미 상당한 이득을 취할 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르즈와 대자본이 성립된 것은 섭정시대 및 여기에 이어지는 기간의 일이었다. 이러한 체제는 실로 제3신분의 요람 이었다. 그 다음 루이 16세 시대에 와서 앙씨앵 레짐의 부르즈와지는 그 정신적·물질적 발전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볼떼르적 문화이상
부르즈와지는 점점 더 모든 문화의 수단을 장악해갔다. 그들은 책을 썼을 뿐 아니라 읽기도 했고, 그림을 그렸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사들이기도 했다. 지난 세기에 그들은 아직 예술과 독서의 향수계층 가운데 비교적 작은 부분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그야말로 교양계급의 대표이며 문화의 진정한 담당자가 된 것이다. 볼떼르의 독자 대부분이 벌써 이 계급에 속하며 루쏘에 이르면 이들의 거의 전부가 그의 독자가 되게 된다. 18세기 최대의 미술품 수집가인 크로자의 후원자인 베르주레는 그보다 더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며 라쁠라스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다. 볼떼르의 책을 읽는 똑같은 부르즈와 독자가 또한 라띤 시인과 17세기 프랑스 고전작가들을 읽는데 그들은 무엇을 읽지 않을까를 정하는 데에서도 무엇을 읽을까를 정할 때와 마찬가지로 단호한 입장을 취한다. 귀족이 16세기이 정신적 대표자이고 신사가 17세기의 그것이라면 18세기의 정신적 대표자는 ‘교양인’ 즉 볼떼르의 독자이다
섭정시대의 예술이상
섭정시대는 비상하게 활기찬 정신적 활동의 기간으로서, 앞 시대에 비판을 가할 뿐 아니라 그 자신 고도로 창조적이며 또한 18세기 전체에 걸쳐 다루어질 문제들을 제기한다. 일반적인 풍기의 문란, 종교심의 점차적인 결여, 한층 무절제한고 사적인 생활의 영위 같은 현상들과 병행하여 예술에서 장대하고 권위적인 양식의 해체가 일어난다. 당시의 공식적인 국가이론이 절대왕권에 대해서 그렇게 핼떤 것과 비슷하게 고전적인 예술이상을 초시대적으로 타당한 원칙으로, 말하자면 신이 만든 원칙으로 설명하고자 했던 아카데믹한 교조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그러한 해체과정이 시작된다. 예술은 이제 더욱 인간적이고 더욱 친밀하며 더욱 차분한 것이 되었다. 즉 약하고 감각적이며 즐거움을 찾는 인간들을 위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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