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

 1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1
 2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2
 3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3
 4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4
 5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5
 6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6
 7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7
 8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8
 9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9
 10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10
 11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11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세종대왕 그를 기억하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세종은 장자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믿음으로 왕이 되었고, 태종의 신뢰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지위에 대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낸 훌륭한 왕이었다. 그는 오로지 백성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생을 바쳤다고 말하기에 아깝지 않을 위대한 한나라의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었다. 세종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그는 많은 부분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두루 갖추었던 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종대왕의 업적에 관해 이야기하다보면 수식어처럼 따라 붙는 대표적인 그의 공로들이 있다. CEO로서 세종대왕의 경영능력과 리더십, 민족적 문화를 꽃피우려는 열정적 노력, 신하들과의 개방적인 공론문화를 통해 청정(聽政)하였던 왕, 훌륭한 장점을 가진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 등의 업적이 그것인데, 무엇보다 그가 훌륭한 당대의 아버지 할 수 있는 것이 과언이 아닌 것은 또 다른데 이유가 있다. 세종에 대해 알아가다 보면 그는 인간미가 물씬 느껴지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인간적이라는 것은 그의 업적에 수식어처럼 등장하는 ‘애민정신’을 구현함에 있어서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진 왕이었다는 것인데, 이것은 여느 통치자에게서나 발견 될 수 있는 수식어가 아닌 것이다. 신분제 사회를 살았던 왕이었을 지라도 그는 인간의 근본적 고통에 대해 가엽게 느낄 줄 알던 왕이었으며, 한나라의 지도자에게 소소해 보일 수 있는 것들에도 그는 간과하지 않고 중요하게, 또 예민하게 대응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간됨과 섬세함이 애민정신을 실천적으로 구현할 수 있던 원동력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그의 성품과 섬세함이 그 시대의 문화 발전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다른 어느 왕조 때보다도 문화부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았고, 예술전반의 부흥에 힘썼던 왕이었다. 그는 궁중에서 자란 탓에 어렸을 때부터 문화적 교양에 익숙한 사람이었거니와 이러한 그의 관심 등이 조선시대를 문화 부흥의 시대로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음악과 미술 등의 예술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문화 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고, 이러한 관심으로 하여금 예술가들도 이끌어 주었던 왕이었다 하겠다. 아래 기사는 세종실록에 실린 일례이다.
세종 46권, 11년( 1429 기유 / 명 선덕(宣德) 4년) 11월 23일 을축 2번째 기사
예조에서 화원에 대한 문제를 아뢰다
예조에서 도화원(圖院)의 정문(呈文)에 의하여 아뢰기를,“1. 화원(員)의 정원(定員)이 40명이온데, 회화(繪)에 소질이 있는 자가 직위를 받으려고 부지런히 업(業)을 익혀서 1년 걸러 취재(取才)에 응하여 품수에 따라 직위를 받사오나, 나이 30이 안되어 거관(去官)하게 됩니다. 거관한 뒤에는 제반 회화에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니나, 그 공로에 대한 상(賞)을 받지 못하고 있사오니, 이제부터 거관하는 자로서 재주 있는 자는 그 벼슬한 여부를 상고하여, 사맹삭 취재(四孟朔取才) 때에 수석을 한 자는 군직(軍職)에 서용하도록 하소서.1. 화원(員) 중에 여러 가지 연고[雜故]와 시사자(時仕者)를 제외하면 겨우 20여 인에 불과하온데, 그림 그릴 일은 대단히 많아서 항상 부족함을 걱정하고 있사오며, 또 그림을 배우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어서 10년 가까이 익혀야만 비로소 공을 이룰 수 있사오니, 비옵건대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의 생도(生徒)의 예에 따라, 액수(額數)에 구애됨이 없이 입속 시켜 전습(傳習)하도록 하소서.1. 그림에 힘써도 하나의 관직도 받지 못하오니, 비옵건대 녹관체아(祿官遞兒)를 주어 한결같이 오랫동안 근무한 자를 매년 서용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 61권, 15년( 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윤8월 29일 기묘 4번째 기사
이조에서 도화원의 직원은 세말에 재주를 시험하여 업무를 근속하게 할 것을 아뢰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인재를 뽑는 모든 아문(衙門)에서 비록 산직(散職)에 있거나 거관(去官)한 자라도 모
두 다 본 아문으로 돌아와 출근하여 본 직업을 폐지하지 아니하옵는데, 유덕 도화원(圖院)의 모든 직원은
거관(去官)하면 비록 나이 젊은 자라도 모두 다 시골로 돌아가게 되어 여러 아문의 격례(格例)와 같지 아니
하오니, 나이 늙고 재주 없는 자를 제한 외에는 본원에 출근하게 하여, 해마다 세말(歲末)에 재주를 시험하
여 본직으로 임명하여서 업무를 근속하게 하옵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