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감히 주장한 경세가이기도 하였다.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작들이다. 그의 학통은 조헌, 김장생 등으로 이어져서 기호 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지어, 주자의 이기 이원론을 더욱 발전시켜 주리 철학을 확립하였다. 그의 사상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성리학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만나자마자 의기 상통했고, 학문적으로 보완하는 관계였다. 퇴계가 새로운 시대 사상인 성리학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면, 율곡은 퇴계가 이룩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성리학을 조선에 토착화한 것이다.
이 레포트를 통해 이황과 이이의 사상을 정확히 구분하여 경
실학파의 태두라 하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이나 성호 이익(1681~1763)에 이르기까지 신분차이를 기본적으로 인정하는 추세였고, 홍대용(1731~1783)의 시대에 와서 비로소 수직적 신분개념이 직능을 기초로 한 수평적 신분개념으로 전환되는 구상을 보였다고 평가된다.
그런데 이들보다 훨씬 일찍이 허균은
조선 외부에서는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멸망하여 중국에서의 유학이 종말을 고했다고 본 조선의 유학자들은 유학을 지킬 역사적 사명감이 있다고 인식하여 조선중화주의를 표방하며 성리학적 사회지배질서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조선 내부와 외부의 변화는 17~18세기에 성호 이익을 거쳐
실학은 역사의 변천과 사회의 실정을 정당하게 파악하여 민족의 각성, 자아의 재수립을 학문의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실학자들은 자아의 자각으로 민족주의 정신을 제시하는데 노력하였으며, 교육·정치·경제등 여러 분야에 걸쳐 과학 사상과 실용학에 힘을 썼다. 실학파들은 성리학을 공리공론적인 관
조선에서 실사구시를 한 개 독특한 학풍으로 장려할 것을 제일 먼저 발론 한 사람은 덕촌 양득중이었다. 그는 이조 영조 5년(1727) 국왕의 접견을 받고 즉석에서 근래 학문계에 허위가 일종의 풍습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 다음, 하간헌왕은 한나라의 현명한 왕자이며, 그가 주장한 ‘실학구시’는
유형원은 1622년에 태어났다. 그가 처한 시대 상황은 지극히 불안정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연대기만으로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유형원선생은 선생이 2세 되던 해에 아버지 한림공 흠이 광해군 복위운동에 연루되어 28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5세 때부터 외삼촌과 고모부로부터 교육을
성리학의 중심개념인 태극·천명·이기·음양·오행·사단·칠정 등의 문제를 하나의 도표 속에 요약하고 이들의 상호관계와 각각의 특성들을 평이하게 설명하고 있음. 특히 이 도설은 후대에 이황과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며 성리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됨.
『입학도설(入
유형원연구』
준비기(16세기 중엽~17세기 중엽)
맹아기(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
전성기(18세기 중엽~19세기 중엽)
특 징
2.2.1.북학 사상의 형성
양란 이후 실용적 학문에 대한 필요성
청의 문물을 받아들여 발전해야 한다는
입장 형성
* 박지원, 홍대용 등 선구적 실학자 들이
북
조선과 대비한다면 특히 생산과 기술면에서 그러한 것이 아주 많다는 것과 이를 배우지도 않고 망한지 오래된 명나라만 숭상하는 낡은 주자학자들과 당시의 봉건 통치자들을 반대하였다. 북학론자들은 구라파의 자연기술과 천주교 즉 당시의 말로 한다념 <서학>과 <서교>를 엄격히 구별하면서 서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