憲宗)이 즉위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임명 되고, 813년, 사관수찬(史館修撰) 으로 임명되어 <순종실록> 완성.
817년, 재상인 배도의 행군사마(行軍司馬)로서 오원제 토벌에 참여해서 공을 세우고,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됨.
819년, 52세에 황제가 불골(佛骨)을 모시려 하자 이에 건의하여 조주(潮州) 자사(
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憲宗皇帝)가 불골(佛骨)을 모신 것을 간하다가 조주(潮州:廣東省) 자사 (刺史)로 좌천되었다. 천성이 강직했던 한유는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좌천, 파직을 당했다가 재등용 되곤 했는데, 만년에 이부시랑을 역임한 뒤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824) 이처럼 순탄치 못했던 그의 벼슬살이와는 달리 한유
憲宗2) 2월 22일에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마쳤다.
다산이 살던 시대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의 英祖正祖純祖임금이 재위하던 기간으로서 조선후기 사회의 마지막 단계요, 조선 말기로 넘어가기 직전 역사적 변동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에는 안으로는 그동안 누적된 사회적 내부 모순이 극심하
憲宗) 때서야 빛을 보기 시작하여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임명되고, [진학해(進學解)]란 글이 당시 재상 배도(裴度)에게 인정받아 예부낭중(禮部郎中)을 제수 받았다. 번진의 발호를 제압키 위해 배도를 따라 회서(淮西)의 군벌 오원제(吳元濟)를 소탕한 공로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이후 평회서(
憲宗)을 시해하고 목종(穆宗)을 즉위시켰을 만큼 그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고, 여기에 우리당쟁(牛李黨爭)마저 가열되어 정국이 매우 어수선하였다. 유우석은 이런 현실에 우려를 표명하며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인재등용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유성준 편저, 「유우석시선」, 민미디어, 2001.3.31, pp. 89~90
憲宗:805-820) 때 유주 자사(柳州刺史)로 좌천되었던 유종원이 죽자 한유는 그 묘지명(墓地銘)을 썼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는 제쳐놓고 오히려 연로한 어머니를 두고 변경인 파주 자사(播州刺史)로 좌천, 부임하는 친구 유몽득(劉夢得)을 크게 동정했던 유종원의 진정한 우정을 찬양하고, 이어 경박한 사
憲宗이 즉위(806)한 뒤 國子博士를 거쳐 都官員外郞이 되었다. 뒤에 裵度가 淮西 지방의 반란을 평정할 때, 한유는 行軍司馬로 일하였고, 난이 평정되자 공로로 刑部侍郞이 되었다.
원화14년(819)에는 헌종이 사신을 보내어 鳳翔 法文寺로부터 부처의 뼈를 궁중으로 맞아들이자 유명한 「諫迎佛骨表」를
憲宗 · 哲宗연간에 살았던 李圭景(1788-?)이 소옹이야말로 聲音學者 중의 第一人者라고 하면서 “邵子의 성음학에 능통해야만 비로소 韻學을 알 수 있을 것(能通邵子之聲音者, 始能知韻字乎.)”이라고 한 것은 소옹이 한글의 창제 무렵부터 그 뒤로 500여 년간 조선의 성음학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
憲宗)때에 국자박사(國子博士)에 임용, 하남령(河南令)에 배(拜)하였고, 사관수찬(史館修撰)에 전임 지재고(知制고) 로 중서사인(中書舍人)에 승진하였다. 표(表)를 올려 불골(佛骨)을 맞는 일을 간하다가 조주자사(潮洲刺史)에 폄직 되었는데, 목종(穆宗)때 불리어 국자좨주(國子좨酒)가되었고, 병부시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