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수립반대 전국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
다음 4개항에 합의했다.
1. 외국군대의 즉시 철거
2. 외국군 철퇴후의 내전발생 부인
3. 외국군 철퇴후의 ’전조선 정치회의‘소집에 의한 임시정부수립과 이 임시정부 의 책임하의 총선거 실시와 통일적 민주정
임시 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를 소집하였으며, 1945.10.10부터13일 까지는 당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그결과 1945년 10.28일에는 `5도 행정국`이 발족되었다. 소련군정에서 인민위원회를 중앙에서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기구였다. 1945.12.17∼18일 분국 3차 확대 집행위원회에서는 `북조선공산당`으
임시정부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여 모스크바3상회의에서 결의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47년 국무회의의 부주석에 취임하였고, 동년 5월 제2차 미·소공위가 열리자 이승만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였으며, 11월에는 유엔감시하의 남북선거에 의한 정부수립안을 지지한다는 성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
→건국 동맹은 여운형(중도좌파) + 안재홍(중도우파)의 좌우 합작 단체임
-치안권을 이행하기 위해 각 지방에 지부(치안대)를 조직 : 145개 지부 결성
→치안대는 자치적인 성격으로 그 지방의 치안을 담당
-건국준비 위원회의 내부갈등이 나타남. 특히 박헌영 등 사회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탈퇴, 국민당 창당
국민당이 한국독립당(임시정부 계열 정당)에 흡수되자 한독당에 입당.
1946년에 우파 신문인 한성일보 사장이 됨.
국민당 강령
# 민족국가의 건전한 발전과 국제 협력의 최선(最善)한 분담됨을 기(期)함.
# 국민 개노(皆勞)와 대중공생을 이념으로 신민주주
돌아온 공산주의자들
38선 이북에서 인민위원회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김일성이라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일성 장군의 명성은 보천보 전투를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김일성은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동북항일연국에 소속되
통합의 기본적 제약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제약 요인에도 불구하고 민족통합운동은 1910년대 이후로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이는 남북통일을 위한 귀중한 역사적 경험이며, 따라서 이에 대해 바로 알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남북통일을 완수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일 것이다.
임시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과 1947년 5월 각각 개최되었지만 ‘협의대상 선정문제’ 표면상으로는 임시정부수립방안을 미소공동위원회와 같이 협의할 한국의 정당 및 사회단체 대표를 선정하는 문제였지만 그 본질은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의 주도권을 둘
Ⅰ. 서론
1919년 9월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는 해방공간까지 존속하면서, 민족주의 계열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국내외적 여건의 변화 속에서 임시정부는 활동상에 많은 어려움에 봉착했으며, 민족운동가들은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와 민족유일당운동을 통해 민족운동의 방략에 관한 새
서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5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한국 전쟁은 해방 후 한국의 가장 큰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침략한 전쟁이라고 볼 수는 없고, 냉전시대의 두 이데올로기 속에서 벌어진 국제적인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