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반정 이전, 조선과 명나라의 관계가 나빴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광해군이 중립외교를 행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사실이다. 광해군이 부분적으로 중립외교를 한 것은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중립외교를 하지도 않았으며, 수차
‘인조반정과 서인정권에 대한 논란’
1. 들어가며
인조반정은 1623년 일군의 인물들이 무력을 동원하여 광해군을 내쫓고 새 임금 인조를 즉위하게 한 사건으로, 조선후기 역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데,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인조반정에 관한 다양한 쟁점
① 인조반정이란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정조의 문체반정
1. 정조(1776-1800)는 “보지 않은 서적이 없다”고 평가될 정도로 명말이래 중국의 학술과 문학에 정통하였다. 즉위전 <<浙江書目>>을 입수하여 체계적으로 북경의 서적을 수입하였으며, 즉위 후 <<四庫全書>>를 구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가 대신 <<古今圖書集成>>을 구입하였다. 현전
500년의 세월을 견뎌온 조선왕조에게 초반 100년 후 등장한 이 세 왕의 집권은 초반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왕조의 역사의 기틀을 마련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안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성종의 시대 후 ‘불안정’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연산군의 시대, 그리고 그런 불안정 이후 혼란스러웠던 왕조의
연산군 7년(1501)에서 선조 5년(1572)에 이르는 시기는 조선에 4대 사화 가운데 3대 사화가 잇달아 일어난 사화의 결정기에 해당한다. 실제로 조식은 그와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과 참변을 당하는 것을 몸소 목격하는 쓰라림을 맛보았다. 남명은 학문과 실천을 통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적극적인 의
반정에 참여하게 된다. 중종반정은 폭정을 일삼은 연산군에 대항하여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왕위로 추대한 사건을 말하며 그 원동력은 훈구파였다. 원래 채수는 중종반정에 참여하기를 거절했기에, 불가피하게 참여하게 된 것이지만 중종반정에 참여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지방으로 내려오게
반정에 의해 폭군으로 전락되고 폐위 당한다.
『광해군일기』는 총 64책으로 광해군 재위 15년 1개월 간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하고 있다. 광해군의 생애만큼 그 편찬 과정이 순탄치 못했던 이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고, 재정상의 문제와 전란으로 인해 결국 인쇄되지 못한 채 전하고
반정에서 반정 주요 인물들과 능양군의 사주를 봐주었고 거사일을 잡아주고 자문을 해주게 된다. 그는 그 공로로 동래부사를 거쳐 경상감사로 부임하게 되지만 서인들의 원수였던 대북파인데다, 혹 역혁명을 꾀할지도 모른다는 추측, 사주로 반정의 성공을 예언하고 주역들의 면면을 정확히 짚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