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통일론
1948년 8월 성립한 이승만 정권은 민족 구성원 모두의 열망이라는 이름 아래, 북한 동포가 스스로 북한을 수복할 수 없을 때에는 무력으로 주권을 되찾을 권한이 있다면서 북진통일론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은 실제로는 북진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고 1947년 트
☑ 북진통일은 무력통일과 국제연합(UN) 감시하의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총선거안을 주요내용으로 하며,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제1단계는 단독정부 수립을 전후한 1948년부터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까지의 선언적 북진통일론의 시기이다. 5·10선거로 구성된 한국의 유일정부 아래 북한의
1. 이승만 정부의 대북 정책
남한은 UN의 감시하에 선거가 실시되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북한은 반국가 불법단체라는 입장견지하였다. 한국전쟁 과정에서도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입장을 미국에 전달하고 휴전협정에 반대하고 참여를 거부하고, 1954년 5월 제네바 회담에서
북진통일론은 이승만이 자신의 리더십을 카리스마화 하려 했던 극단적인 예이다. 당시에 실질적으로 북한을 공격하여 승리할만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이승만이 북진통일론을 국민적 표어로 내세워 주장한 것은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북진통일론은 단순한
북진통일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구조와 냉전적 국제환경을 악용하면서, 정권연장에 발판으로 삼는 귄위주의적 경향을 보였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이러한 정부의 행태에 대해 대부분 민간단체 그리고 국민들은 통일의 논리를 내세우기 보다는 국가의 지속에 대해 위기감 속에서 이상
북진통일론과 관련해서는 홍용표의 연구가 독보적이다. 홍용표는 이승만의 북진통일론의 성격이 다층적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해간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전반적으로 긍정/부정의 이분법을 뛰어 넘고 있다. 홍용표, 「국가안보와 정권안보: 이승만대통령의 안보정책을 중심으로, 1953~1960」,
북진통일론을 개진하기에 이른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북진통일론이 대두된 것은 통일국가 수립에 대한 우리민족의 염원을 전세계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공산주의자들의 통일공세에 대해 대안을 제시할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무력통일 불사론이라든가 휴전협정 체결기의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