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전개해왔고, 집중적으로 살펴가는 것이 그 당시의 실정을 쉽게 파악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 논문에서는 그런 부분보다는 고려의 북진정책과 윤관의 동북9성에 관한 내용을 집중적으로 이해하고 현재의 우리가 알고 있는 현재의 역사관을 재평가해 보고자한다.
제4장 한미유엔군의 북진공격
1. 한국전쟁의 개시와 미국
미국은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국민당 정권이 패배하고 공산정권이 승리하는 것을 보며 아시아전략 최초의 정책문서인 NSC48을 1949년 12월에 책정한다. 이 문서에는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힘을 기본적으로는 ‘봉쇄’하고, 가능한 곳에서만 ‘감
북진 계획에 대하여는 반대의 견해를 나타내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관련하여 미국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과연 북한의 침공을 전혀 예측하지 못하였는지 즉, 북한의 기습공격이었는지 여부이다. G2의 보고나 KLO 보고 등의 자료들을 토대로 판단하건대 미국은 전쟁 발발 당시 이미 소련의 간접
제 4 장 한미유엔군의 북진공격
1. 한국전쟁의 개시와 미국
* 애치슨 방위선과 주변의 반응 : 미국의 전략목표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힘을 봉쇄하고 가능한 곳까지 감퇴시킨다는 봉쇄와 반격, 양의로 표명하는 미 정책문서는 1949년 NSC 48에서 처음 표명되었고 1950년 NSC 68로 적극화되었다. 국무장
북진계획을 경계함과 동시에 대응병력을 지원하고, 경제와 국내 체제를 안정시키는 것을 당면과제로 보았으며, 6월에 동경에서 있었던 회담이나 6월 18일날 있었던 덜레스의 국내 연설 또한 한국전쟁에 대한 특별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예측했냐
북진계획도 경계하는 상황이었고, 타이완과의 관계 강화 움직임 등으로 이승만을 미덥지 않아 했다. 한편 미국은 월러비의 G2보고서로 추측하건데 북한의 전쟁 준비는 미군의 첩보조직에 의해 이미 포착되고 있었다. G2보고서에는 북한의 북으로의 사단 이동, 50년 3,4월 침공설 , 6월 침공설 등을 보고한
북진통일’, ‘북벌통일’의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한 이승만의 생각은 그의 편지나 발언에 잘 드러나고 있다. 그는 당시 남한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으로 북한에 열등함을 미국의 원조를 받음으로써 극복하여 이겨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더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원조를 합
북진계획 역시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는 8개 사단 및 1 기갑사단, 미군장비 등을 통해 북한과 대등한 군사력을 키워나가며, 50년 5월 30일 이후 장제스 정부와의 관계 강화 움직임을 보였다. 이승만 정부가 이런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무렵, 월러비의 G2는 1950년 4,5월에 남침이 있을 것 같
인천 상륙 작전과 점령정책(한미 유엔군의 북진 공격)
1. 한국전쟁와 미국
- 한국 전쟁 발발과 관련된 미국의 기본전략의 전개를 살펴보면 우선, NSC 48(1949.12)로 이는 중국에서의 공산정권의 승리에 대해 미국의 전략목표를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힘을 봉쇄하고 가능한 한 감퇴시킨다는 목표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