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35년(1759)에 왕명으로 편찬한 무예신보를 참고로 하여 42종에 달하는 각종 무예를 도해, 설명한 병서로서, 정조 14년(1794) 4월 29일(음)에 완간되었다. 이 병서는 4권 4책으로한문책과 1권 1책으로 된 언해본이 있는데, 오늘날 현재하지 않는 무예제보 및 무예신보의 주요내용을 인용하고 있어서 이진왜
영조를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하면서 이전과 다른 성격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 나라의 운명을 짋어지고 있던 왕조에서 아버지와 아들이자 왕과 신하였던 영조와 사도세자는 무엇 때문에 갈등을 겪고 사도세자는 어떠한 요인 때문에 난폭했던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8살에 왕세손에 임명되었다. 1762년 아버지 사도세자가 소론을 지지하여, 노론을 지지하는 영조에게 비극적인 죽임을 당하자, 10살에 죽은 영조의 맏아들 조선 진종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
1775년에는 손자의 권력 기반을 마
영조)로부터 죽임을 당했다고 보여지지는 않는다.
1735년 영조가 왕권의 정통성을 갖는 왕손이 태어난 것을 그렇게도 기뻐하였는데 다른 곳도 아닌 뒤주에서 왜 세자를 죽게 하였나는 이 작품에서 첫째, 당쟁의 희생물이며 둘째, 아버지 영조의 성격이었으며 셋째, 비정통적 선대 왕권의 자존심을 세우
1.1 정조의 출생
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
영조 31년(1755) 최초로 편찬하고 영조 39년(1763)에 2차로 편찬하였으며 영조 45년(1768)까지 지속적으로 보충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편자에 의해 지속적으로 改選되었으며, 후대에 다른 사람에 의해 작가 및 작품을 추가하면서 보완되기도 했다. 『해동가요』의 편자 및 전사자들은 여말부터의 역대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으로 간택되고, 10세에 가례를 올리고 입궐한다. 혜경궁 홍씨는 영조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1752년(영조 27) 아들 정조를 낳아 지위를 튼튼히 했다. 또한 아버지 홍봉한은 과거에 급제하여 고속승진을 계속해 나가는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점차 세자의 정신
영조 38년(1762) 5월13일 세자를 불신하던 영조는 세자를 폐서인 시키고 뒤주에 가두도록 명을 내렸다. 그리하여 8일 만인 5월21일 세자는 창경궁 남문인 선인문 부근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이 사건을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 한다. 2년 뒤 영조는 세자의 죽음을 뉘우치고 <금등 (金藤)>이라는 글을 써서 도승
●『영원한 제국』에 대해서
주제 선택 동기
1. 폭넓은 시대배경
나머지 주제들은 정조 대의 일정 사건이나 업적을 다룬 서적이지만, 『영원한 제국』이라는 소설은 사도세자와 영조에서부터 정조까지의 시대배경을 폭넓게 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책을 읽어보니 영조대에서부터 뿐만
: 허준이 왕명을 받아 편찬. 胎産과 痘瘡에 관한 방문이 실려 있다. 허준의 「東醫寶 鑑」(25권)은 식물, 동물, 광물의 이름에 한글표기가 되어 있어 국어연구에 좋은 자료
(2) 東國新續三綱行實圖 (광해군 9, 1617)
: 「三綱行實圖」의 본을 따라 임진왜란 중에 목숨을 잃은 효자, 열녀, 충신에 관한 기 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