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 과정 속에서 2천여 년 세월 동안 중국적 사고유형의 근저를 제공한 유교가 서양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어떠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Ⅱ. 서구의 영향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는 서구문물이 들어와 정치․사회․경제구조를 뒤흔들어 놓는다. 청조는 아편전쟁과
청에 왕래하며 외국 문물을 소개한 해국도지, 영환지략등의 서적을 구입하여 이를 널리 권장하였다. 의업에 종사하던 중인 유대치는 오경석과 가까워 그에게서 서양문물에 관한 책을 얻어 읽고 통상과 개화를 주장하였다.
고종과 그 측근의 개화정책은 당시 증국번, 이홍장등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근대화 노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당한 정도의 연구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조선말의 복합적인 정치상황과 조선의 근대화 움직임에 대한 자주적인 발전상을 규명하기에는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조선말의 시대변화의 중심에 있었던 고종에 대한 연구는 그러한 한계점을 극복
근대화 조약이자 불평등조약 (해안 측량권, 치외법권 허용).
1882
조·미 수호 통상 조약(朝·美 修好 通商 條約)
청의 알선으로 미국과 맺은 조약 (치외법권, 최혜국대우 규정).
1882
임오군란(壬午軍亂)
민씨 정권에 대한 도시 하층민의 불만과 별기군에 대한 차별로 인한 구식군인들의 불만으로 이들
Ⅰ. 들어가며
일본은 막부 봉건체제가 막을 내리고 명치유신이라는 근대적 개혁의 수순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서른셋의 나이에 막부 순찰대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지만, 젊디젊은 그가 남긴 족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가 죽임을 당한 해가 1867년이었고, 명치
말하려는 것이다. 다른 문명권과는 다른 보다 세련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동아시아 문명권의 대표인 중국이 유럽의 해양팽창의 마무리 단계에서 겪은 굴곡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여러모로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특히 서양 제국주의 팽창의 본질적 성격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란 점
청조의 지배체제를 어느 정도 안정시키는데 성공한 청조는, 진압에 공이 큰 증국번 이홍장 등 한인관료를 중용하여 군수공업을 중심으로 서양의 것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추진하니(이른바 '中體西用') 이것을 洋務운동 혹은 '동치중흥'이라고 한다. 증국번 이홍장 등은 청조의 협조 하에 소속군대의 근
청·러관계
1) 시대적 배경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1613-1917)와 청 왕조(1616-1911)는 거의 같은 시대에 300년가량 지속되었다. 양국 간의 관계는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한 영토조정과 무역협상에서 출발하여 청말기에는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탈의 형태로 이어졌다.
2) 뻬르히예프 사절단(1670)
1670년 러시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던 정부는 중앙군을 더욱 강화하는데 주력하였다. 대한 제국은 먼저 황제 호위부대인 시위대를 확충 강화했다. 즉 광무 2년(1898) 시위 제 1·2대대를 합쳐 시위 제1연대로 편성한 것이다. 이듬해 12월에는 시위대에 포병 1개 중대를 배속시킴으로써 수위대의 전력을 크게 증강 시켰고,
청 일원에 진입했을 뿐이다. 1890년부터 개항장에 정미소가 출현하기 시작했던 것 이외에 자본제적 기업은 아직 미발생이었다. 오히려, 농촌장시가 다시 확산되고 있었듯이, 전통경제는 개항의 자극으로 활성화되었으며, 이러한 과도적 상태는 대체로 1910년대까지 지속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개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