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술과 교정을 보았다 했으니 악지는 신중하게 서술되었다고 판단된다. 악지의 첫머리에는 다음과 같이 악(樂)을 정의하고 있다. 당대 사대부들의 관점에서 효용성을 우선하여 음악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풍화(風化)를 수립하고 공덕(功德)을 본받게 하는 것.” 《고려사》권70. 제1장
그렇다면 《
찬술 배경 및 의도
1> 시대적 상황과 현실인식
고려사회는 가문과 문벌을 중시하는 호족출신들이 그들의 특권을 누리는 귀족제도였다. 그러나 이런 귀족제도는 그 자체의 내부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세력이 분열도는 조짐을 보이더니 급기야 내부에 큰 동요가 일어 붕괴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에서 문
찬술하나, 사서로서의 체계를 이루지는 못하여 이를 考라 칭한다. ‘발해고’에 따르면 발해는 진국공 걸걸중상을 거쳐 고왕(대조영)이 창업한다. 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에 거처하여 부여 옥저 등 10여국을 차지한다. 국토는 사방 5000리이며 호구 10만, 군사 수만을 가졌으
찬술했다고 하는 『춘추(春秋)』에서 유래하였고 전국시대의 명칭은 전국시대의 사실을 기록한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하였다. 그리고 역사적 사실로 양 시대를 구분해 보면 주(周)의 동천(東遷)에서 진(晉)이 삼분되어 한(韓)·위(魏)·조(趙)가 독립했던 기원전 453년까지를 춘추시대라 하고, 그 이
찬술하고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이 때 유교적 교육에 의해 충효사상이 생활화되어지고 유교적인 정치이념이되었으며 9세기 신라 말가에는 유학자들이 당시의 사회 모순에 저항하는 분위기를 형성하여 왕건의 고려 건국을 합리화시키는 아이러니를 낳기도
용비어천가>의 개관은 세종 27년(1445)에 왕명을 받은 정인지, 권제, 안지 등이 편찬한 악장으로, 찬술의 목적과 동기는 목조로부터 태종까지의 여러 사적을 낱낱이 들어 국조 창업(國祖創業)의 어려움과 그 천명성(天命性)을 강조하여, 후왕에 대하여는 계감을, 신하들에 대하여는 충성을, 백성들에 대하
찬술되었다. 전체 10문 중 제7문인 〈가행화세분(歌行化世分)〉에는, 균여가 보현십원(普賢十願)에 따라 지은 〈예경제불가(禮敬諸佛歌)〉 이하 l1수의 향가가 실려 있고, 제7의 전문(前文)에는 그 작가의 유래를 밝혔다.
또 제8 〈역가공덕분(譯歌功德分)〉에는 균여와 같은 때의 사람인 최행귀(崔行
찬술 또한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다.ꡑ라하여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청의 위려동은 ꡐ헌원 기백의 책은 춘추 전국시기 사람의 작품인데, 상고를 의탁한 듯하다.ꡑ고 하였다.
이렇게 역대로 《황제내경》을 황제의 작품이 아니라는 설이 대두하게 되는데, 현재는 일
단순히 학덕 높은 노화상으로 존경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 <<삼국유사>>의 석혜공전에는 원효가 혜공에게 문학한 사실이 보이고 있다. 즉, 당대의 신승 혜공이 그 만년 항사사에 있을 때 원효가 제경 소를 찬술하면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는 언제나 혜공에게 가서 질의하였다는 것이다.
찬술한 『술이기(述異記)』에는 이와는 다른,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2) 설화 2
「옛날에 남선 고을의 남선비는 여산 고을의 여산 부인과 부부가 되어 아들 7형제를 두었다. 아들이 많아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배를 마련하여 쌀장사를 하기 위해 오동 나라 오동 고을을 찾아갔다. 거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