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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고 독후감
존화, 중화에 입각한 중국의 팽창주의는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중국은 발해를 당나라의 지방정권 수준으로 축소 시켜놓으며 한민족의 활동반경을 한반도로 좁히려 하고 있다. 그런데 발해를 한민족의 역사라고 분명히 선언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유득공이다. 그는 무엇인가를 절대적 기준으로 놓지 않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상대주의적 태도를 가졌는데 이런 상대주의적 세계관 아래서 펼친 것이 북학사상이다. 유득공의 대표작인 ‘발해고’는 당나라 시대 지어진 ‘발해국기’의 흔적이 남아있던 ‘신당서’에 주로 의존했다. 여기서 그는 남북국시대라는 역사의식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그는 종래 신라에 주력하던 역사인식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역사 무대를 만주 일대까지 확대시켰다. 실재했으나 당시까지 거의 언급되지 않던 발해를 우리 역사로 편입시킨 것은 상대주의에 입각한 북학사상이 역사에 표출된 사례라 하겠다. 박제가는 정유집에서 고려는 망할 때까지 압록강 밖으로 단 한걸음도 딛지 못했다고 평하며, 우리의 식견이 그 안에 갇혀 있음을 한탄한다. 그러면서 유득공의 발해고를 높이 평가하는데 이는 유득공 본인의 의견과도 비슷하다. 유득공은 발해 유민을 10만이 넘게 받으면서도 발해사를 짓지 않아 거란, 여진을 꾸짖을 수 없었으며, 마땅히 남북국사가 있어야 했으나 고려가 이를 외면함을 아쉬워한다. 유득공은 여러 문헌을 참고하여 발해의 사실들을 찬술하나, 사서로서의 체계를 이루지는 못하여 이를 考라 칭한다. ‘발해고’에 따르면 발해는 진국공 걸걸중상을 거쳐 고왕(대조영)이 창업한다. 조영은 이해고가 이끄는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동모산에 거처하여 부여 옥저 등 10여국을 차지한다. 국토는 사방 5000리이며 호구 10만, 군사 수만을 가졌으며, 습속은 고구려나 거란과 같았다. 국호를 진이라 하고, 진국왕에 올라 홀한성을 쌓고 살았다. 그 때부터 발해는 멸망 때까지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다. 고왕의 아들 무왕은 말갈을 백성으로 삼는다. 흑수말갈이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당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흑수말갈을 공격하라 명하나 무왕의 아우 대문예가 이를 어기고 당으로 도망치자, 무왕은 직접 등주를 공격해 자사 위준을 죽인다. 결국 흑수의 땅은 모두 발해에 정복된다. 무왕의 아들인 흠무는 수도를 상경으로 옮겼다 다시 동경으로 옮겼으며, 안녹산의 난을 거친다. 그 뒤를 이어 폐왕, 성왕 강왕, 정왕, 희왕, 간왕, 선왕이 차례로 즉위한다. 선왕은 남으로 신라를 치고 북으로 여러 부족을 정복해 영토를 크게 넓힌다. 다시 그 뒤를 이어 대이진, 대건황, 대현석, 대인선이 차례로 왕위에 오르나 대인선에 이르러 요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수도 홀한성이 함락된다. 그 후 흥요왕, 오사성, 부유부, 염부왕 등이 요와 거듭 싸우고 오대사에도 그 존재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발해는 일찍이 망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발해고에서는 발해의 왕들을 모신 신하들도 다룬다. 그 중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공격할 지 여부를 두고 형인 무왕과 다투다 당나라로 건너간다. 무왕은 거듭 대문예를 죽일 것을 청하나 당은 그를 죽이지 않는다. 양승경은 문왕 때 일본으로 사행했고, 일만복 역시 일본으로 사행을 했다. 대인선 이후에도 신하들의 이름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 중 대광현은 고려의 세자로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에 귀순한다. 그 뒤 요나라가 고려와 화의의 표시로 낙타 50마리를 보내나 왕건은 그 교빙을 거절하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어 모두 굶겨 죽인다. 발해의 지리를 살펴보면 발해는 5경, 15부, 62주의 체계를 갖추었다. 그 안에는 평양이 포함된다.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후 다스린 것은 압록 이북 뿐이라 그 이남 지역의 연혁은 고증할 길이 없다. 발해고에는 발해의 관직명, 특산물, 언어, 의장 등도 간략하게나마 소개되어 있다.
발해고의 작가 유득공의 역사인식은 오늘날에도 여러모로 살펴볼만 하다. 그는 발해고의 저술 목적을 밝히면서 고려가 발해를 계승하지 않았음을 늘 아쉬워한다. 그는 그것을 아쉬워하는 것을 뛰어넘어 역사인식의 영역까지 견해를 확장한다. 그 때 제대로 된 를 짓지 못하여 그 땅이 우리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록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 것이라 생각한다. ‘기록’에 남는 순간, 그리고 그 기록이 계속 되는 이상 과거는 더 이상 과거일 수 없다. 그 ‘과거’를 읽는 현재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발휘하고, 그 현재의 사람들이 만들어나갈 미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 면에서 과거는 더 이상 과거라 할 수 없다. ‘역사’라는 것을 과거의 틀에 매어두고,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 식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다. ‘기록’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오늘날 우리가 어떤 현실을 만들어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더 선행되어야 한다. 유득공은 기록과 역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 고민이 발해고로 이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