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 지배를 받던 시기에는 통용되지 않았다. 식민사학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아직 고대사회에 속한 열등생으로 ‘정체’와 ‘타율’의 낙인이 찍혔다. 역사발전의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식민사학을 극복하고 민족을 주체로 세우는 것이 역사학의 일차적인 과제였다. 우리 역사에도 중세가 있었다
사학,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민족, 계급, 자본과 같은 전통적 역사 범주를 털어내고 미시사, 문화사, 여성사,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식민주의 등 새롭고 다양한 연구 분야가 넘쳐나고 있다. 이처럼 카의 역사학은 20세기 한국 사회, 한국 역사학에 지대한
1.한국인은 단일 혈통이 아니다.
우리민족의 원류가 북방계와 남방계로 이뤄져 있다는 것은 학계가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단일 민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민족의 동질성과 민족적 역량을 결집시키기 위해 나온 얘기이지만 이는 역사를 바로 보는 길이 아닌 것이
역사학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근대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서유럽을 통해 근대의 특징을 알아 본 후, 현재까지도 논의되고 있는 근대의 기점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Ⅱ. 해방이후 남한 역사학계의 조류
1950년대 이후 남한에서는 일제의 식민주의 학자들이 한국사를 왜곡하기 위해 내놓은 정체
사학 방법론의 발전’과 ‘분류사 연구의 확산’ 그리고 ‘해방공간의 역사인식’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민족사학 방법론의 발전
1930년대는 민족사학뿐만 아니라 민족운동 전반에 걸쳐 체제와 사상이 정비되고 발전한 시기였다. 1920년대의 민족운동 유사단체나 사이비 민족 운동가는 주
식민지시대)의 시대구분
1. 강만길
1) 1910
3.1운동
2) 3.1운동이후
만주사변(1931)
3) 만주사변이후 일본패전
제 1기는 ‘합방’에 반대하는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무단통치의 분위기 속에서 행정·경제·사회·문화면에서 식민통치의 기반을 마련해 갔던 시기
제 2기는
Ⅰ. 일제(일제강점기, 식민지시대)의 계엄령
1. 일제의 '계엄령'은 천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1882년 8월 5일에 제정된 일제의 '계엄령'은 천황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계엄의 근거는 “천황은 계엄을 선고한다”라는 내용의 대일본제국헌법 제14조였으며, 계엄의 요건의 존부는 “계엄을 선고
Ⅰ. 개요
1910년 병합 이후, 식민지조선을 대상으로 표방된 동화주의는 한편에서의 무단권력과 함께 식미지조선인에게 일선동화에 대한 동의를 유도해 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동화정책을 표방하면서 일제는 이론적 근거 중의 하나로 일선동조론을 내세우고 있다. 일선동조론은 일본의 근대사학연
Ⅰ.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내선일체론
일제하에서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식민지 통치의 목표는 동화주의의 완성에 있었다. 일제는 그간 동화주의의 다른 표현으로 일시동인, 내선융화 등의 용어로 식민지 차별을 무마해 왔다. 그나마 우가끼(宇垣一成) 총독이 부임하면서 내건 내지